스티븐 킹 ‘맹글러’ - 흑마술을 완성하는 영광의 손
처녀의 피, 묘지의 흙, 박쥐의 피, 밤 이끼, 말발굽, 두꺼비의 눈, 그리고 영광의 손
지하실에서 솥단지를 저으며 히죽히죽 웃는 마녀가 떠오르는 목록이다. 호러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 ‘맹글러(Mangler)’에서 다림질 기계를 살인귀로 만든 재료들이다.
[줄거리]
미국의 한 세탁소. 다량의 세탁물을 다림질하는 고속 다림질 기계에 연속적으로 사람들이 빨려들어가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주인공 헌튼 형사는 영문학 교수인 친구 잭슨와 함께 사건을 조사하면서 초자연적 악귀가 기계에 씌었다는 의혹을 갖게 된다. 그들은 조사 끝에 흑마술에 사용되는 재료, 즉 처녀의 피, 묘지의 흙, 박쥐의 피, 밤 이끼, 말발굽 등이 다림질 기계에 빨려들어가 일종의 주술로 작용하여 악마를 소환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최악의 주술에는 ‘영광의 손’이 필요하지만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라 재료로 쓰였을 가능성은 적다. 주인공은 가장 강력한 악귀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여 퇴마 의식을 준비하고 시행하지만 오히려 기계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는데...
위생을 중시하는 세탁소에 이런 이상한 재료들이 들어갈 수 있는지 의문스럽지만 주인공을 따라 차근차근 추리해 보자. 공교롭게 근처에 묘지가 있고 오래된 건물이라 박쥐도 있다. 이전에 세탁소 기계에 손이 빨려들어가 다친 여성은 성경험이 없으니 처녀의 피도 해결되었다.
밤 이끼와 말발굽이 좀 이상하긴 하다. 주인공들은 메타포를 아는 현대인답게 광의로 해석한다. 밤 이끼는 밤에 채취한 지의류 식물(식용으로 쓰이는 종류도 있다), 말발굽은 젤라틴이 들어간 디저트 식품(젤라틴에 실제 말발굽이 들어가진 않지만 그런 미신이 있다)으로 대체 가능하다. 최고의 악마를 불러내는 데 사용되는 고전적 아이템인 영광의 손은 극히 접하기 어려운 재료이므로 배제한다.
영광의 손을 무시한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영광의 손'은 해리포터 시리즈에도 등장하는 유럽의 오컬트 아이템이다. 사형수의 손을 방부처리한 것으로, 지닌 사람은 투명망토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도둑들에게 인기있는 물건이었다. 다른 의미도 있다. 약용식물인 아트로파 벨라돈나(Atropa belladonna)의 별칭이 ‘영광의 손’이다.
헌튼과 잭슨도 이 사실은 알고 있었다. 벨라돈나는 유명한 독초로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주로 자라기에 미국 세탁소에 우연히라도 들어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벨라돈나에는 항콜린 작용을 하는 스코폴라민, 히오시아민 등 강력한 알칼로이드가 있다. 이들 성분은 체내에서 분비되는 신호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을 억제하여 부교감신경의 활동을 방해한다. 부교감신경은 동공 수축, 맥박 및 호흡 감소, 소화 촉진 등의 작용을 하는데, 이 신경이 억제될 경우 동공이 확대되고 심박이 빨라지며 심한 경우 호흡마비, 혼수상태, 사망으로 이어진다.
벨라돈나가 오랫동안 독약으로 사용되었으니 알 만하다.동공 확장 효과가 있어 유럽 여성들이 벨라돈나 즙을 눈에 넣어 서클렌즈처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맹글러의 주인공들이 약에 대해 알았더라면...
벨라돈나는 항콜린 성분이 포함되어 소화촉진 작용을 하기에 의약품 성분으로 사용된다. 이전에 다림질 기계에 끼어 죽은 여성은 소화불량이 있었고, 복용한 소화제에 벨라돈나 추출물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영광의 손 덕분에 최고로 강력한 악마가 소환되었지만 주인공들은 몰랐다. 문과 출신 형사와 영문학 교수였으니까. 그들은 상대를 우습게 보고 퇴마 의식을 치루었다가 도리어 악귀를 도발하여 세탁소 밖으로 풀어주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벨라돈나 성분은 우리 주위, 21세기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부교감신경을 억제해서 콧물, 가래 증상을 줄여주기에 감기약 성분으로 사용된다. 라벨에 ‘벨라돈나 총알칼로이드’라 기재된 감기약이 일반의약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벨라돈나의 성분인 스코폴라민 또한 항콜린 작용을 하여 위장관 운동을 감소시켜 멀미 증상, 위장관 경련 완화에 사용한다.
영광의 손을 구하기는 간단하지만 경질환 증상을 완화할 정도의 적은 용량이니 독약으로 사용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 각종 기계에 넣어서 악귀를 부르는 행위는 더더욱 권장하지 않는다! 캡슐이 터지면 치우기만 번거로워진다. 가마솥에 넣고 주술 거는 시대는 지났다.
약이 곧 독이고 독이 곧 약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은 벨라돈나에 딱 들어맞는다. 강력한 독약이 일상에서 소소한 질환 치료에 사용됨을 주인공들이 알았다면 악귀를 풀어주는 치명적인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독이다.
참고문헌
Berdai MA, et al. Pan Afr Med J. 2012; 11: 72.
Akbar S. Atropa belladonna L. (Solanaceae). Handbook of 200 Medicinal Plants pp 373-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