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런’ – 리도카인과 다리 마비
영화를 볼 때 저마다 가중치를 두는 항목이 있다. 김쌤은 20세기 중반 스타일의 고전적 미녀미남이 나오면 무조건 점수를 더 준다. 조쌤은 음악이 좋으면 별 3.5부터 시작한다.
나도 화면과 음악을 중시한다. 시청각적 즐거움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매체의 매력이 다운된다. 이야기나 설정의 부실함은 감각의 행복으로 대체하는 편이다. 과학적 오류나 고증에도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거슬림을 발견할 때가 있다. 특히 질병이나 약을 이용하는 방식에서 뾰족 튀어나오는 가시들이 걸린다.
영화 ‘런(Run)’은 가족 미스터리이자 탈출 스릴러다. 당뇨병, 천식, 하지 마비 등 온갖 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클로이와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엄마 다이앤이 주인공이다. 다이앤은 딸이 복용하는 많은 약을 챙기면서 홈스쿨링까지 한다. 수학, 문학, 물리학까지 가르치는 걸 보니 이 엄마, 먼치킨 속성이 다분하다.
완벽하게 사이 좋은 모녀로 보이지만 좀 수상하다. 클로이는 워싱턴 대학의 합격통지서를 기다리는 참인데, 엄마가 항상 우편물을 먼저 챙긴다. 어느 날 클로이는 자신이 아닌 다이앤의 이름이 기재된 처방약을 본다. 자기에게 먹이던 초록색 약이 들어있는 약통인데 말이다. 수상하게 여긴 그녀는 선반을 뒤지고, 라벨에 붙은 트리곡신(trigoxin)이라는 약품명을 본다. 라벨을 뜯어 보니 역시 엄마의 이름이 있다. 엄마가 처방받은 약을 딸에게 먹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미스터리가 시작된다.
휴대폰도 없고 인터넷도 먹통이라 전화로 약의 정체를 파헤치던 클로이는 트리곡신이 심장질환에 사용하는 약임을 알게 된다. 심장에 이상이 있으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트리곡신이 빨간색이라고 한다. 이 초록색 약이 뭔데 가짜 라벨까지 붙여딸에게 먹일까?
*트리곡신은 가상의 약이다. 실제 강심제인 디곡신(digoxin)을 차용한 듯하다.
우여곡절 끝에 약국에서 약사가 가르쳐 준 약의 정체는 리도카인(lidocaine)이다. 동물에게 사용하는 근이완제인데 사람에게 먹일 경우 하반신이 마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스터리는 폭발한다.
하지만 머릿속이 의심으로 샛노란 나는 suspense가 suspend되는 경험을 했다. 대뇌 피질에서 거대한 물음표와 함께 다음 질문이 떠올랐다. “왜 하필 리도카인인가!?” 영화는 결말을 향해 가파르게 치달았지만 통 집중할 수 없었다. 아, 슬프다.
리도카인(lidocaine)은 트리곡신과 달리 실제 존재하는 약으로, 흔히 볼 수있는 국소마취제다. 치과에서 신경치료나 발치 전에 따끔하게 찌르는 마취주사의 성분이며, 화상이나 외상이 있을 때 통증을 경감시키기 위해 바르는 연고에도 포함된다. 성교 전에 성기의 예민한 촉각을 감소시킬 목적으로 바르는 크림이나 젤에도 리도카인이 들어간다.
리도카인은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고 부작용의 우려가 크지 않아 널리 사용된다. 주사제, 연고, 겔, 크림 등으로 시판되지만 먹는 약으로는 출시되지 않았다. 경구로 섭취하면 위장관에서 흡수된 후 간에서 대사되어, 실제로 원하는 부위에서 약효를 나타내는 비율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리도카인을 경구 투여할 때 생체이용률은 30% 정도로 보고된다.
리도카인이 신경 전달을 차단하긴 하지만 ‘먹는 약’으로 ‘원하는 부위’에 ‘지속적인’ 마비를 일으킬 수는 없다. 리도카인 투여 시 근육이나 신경의 부작용 보고가 있지만 대부분 고농도로 주사한 부위에서 일어난 사례다. 간혹 심장이나 뇌에 독성이 나타났는데 이 역시 매우 고농도로 노출되었을 때 발생했다. 영화에 나오는 초록색 캡슐 정도는 먹어봤자 별 영향 없이 체외로 배출될 것이다.
최근에 리도카인 경구제를 개발하려는 연구가 있지만 어디가지나 경구제의 생체이용률을 높여서 통증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목적이다. 주사보단 먹는 약이 편하니까 말이다. 먹는 약을 통해 신체의 원하는 부위를 마비시킨다는 설정은 SF의 영역이다. 리도카인을 복용해서 생기는 다리 마비는 사랑의 묘약에 버금가는 과학적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적 거짓말은 재미있는 허구로 즐겁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마이클 베이의 ‘더 록’에서 VX가 그냥 보기에도 독을 뿜뿜할 듯한 초록색 구슬이 아니었다면, 니콜라스 케이지가 아트로핀을 궁둥이에 정갈하게 찔렀다면, 덜 극적이고 덜 영화적이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픽션에서는 사실보다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노란 관객에게 리도카인이 유독 거슬렸던 건, 너무나 평범한 약을 괴상하게 이용한 방식이 영화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위해 클로이가 하지 마비여야 한다면,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엄마가 무언가 해야 한다면,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이 ‘약’일 것이다. 다이앤이 밤마다 클로이의 다리에 시술하거나 주사하는 설정보다, 약을 먹이는 편이 일상 속의 서스펜스를 추구하기 좋을 수 있다. 비교적 친근한 약을 사용해서 몰입에 방해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리도카인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전문용어나 새로운 정보가 과도하게 제공되면 박진감이 떨어지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도! 리도카인이 일으키는 하지 마비는 감기약이 코로나19를 치료한다는 설정만큼 당황스럽다. 트리곡신처럼 아예 가상의 약을 등장시키거나, 먹는 약으로 다리가 마비될 수 있는 설정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라도 첨가하면 나았을지 모르겠다. 대놓고 영화적 뻥을 화려하게 전시하는 마이클 베이 영화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얌전하게 정서된, 꽤나 현실감 있는 이 스릴러에서 리도카인 구라는 톤에 안 맞는 이상한 돌출물이다. 영화 진행에 키가 되는 설정이기에 더 아쉽다.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전작은 2018년작 ‘서치(Search)’다. 영화 전체를 컴퓨터, 휴대폰, CCTV 등 모니터 화면으로 구성한 발상과 뚝심, 주요 배역이 전부 아시아계라는 특수성, 거기에 이야기적 재미와 미스터리가 주는 긴장감까지 건진 더없이 깔끔한 스릴러였다. 차기작인 '런'도 연출이나 흐름상으로는 나무랄 데 없이 매끄럽다. 집중력장애 중증인 성인에게 90분이라는 적절한 러닝타임도 딱! 좋았다.
전작인 서치가 SNS, 인터넷, 모바일을 극대로 활용했다면 런은 대조적으로 이런 온라인 도구가 배제된 상황을 이용한다. 다이앤은 클로이를 물리적으로(다리를 쓸 수 없게) 구속할뿐더러 사회적으로도 고립시킨다. 집에서만 지내기에 친구도 선생님도 없고, 휴대폰과 인터넷도 사용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이라니. 모바일로 약 정보 정도는 금새 체크할 수 있는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이런 상황 자체가 호러이고 서스펜스다. 빌런인 다이앤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러닝타임을 낭비하지 않고 클로이가 갖는 의심과 공포에 집중한 감독의 선택은 무척이나 영리하다.
99개가 좋았는데 마음에 걸린 1개 요소, 리도카인 때문에 아쉬우면서 기억에 남는 영화다. 약 때문에 영화의 미덕을 깎아내릴 수는 없지만, 어쩐지 매끈하고 예쁜 선물상자에 삐죽 튀어나온 가시 같다. 차감독이 시나리오 집필할 때 리도카인에게 마취당했나 잠시 상상해 본다. 차기작에서는 목에 걸리는 설정은 피하기를.
참고문헌
ALQuadeib BT, et al. Int J Nanomedicine. 2020 Feb 5;15:857-869
Torp KD, et al. Lidocaine Toxicity. StatPearls Publishing; 2020 J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