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스 아웃’ vs ‘머더 미스터리’
어떠한 진실이라도 확인되지 않은 의심보다는 낫다.
-아서 코난 도일
밝은 빛에 노출된 후 눈감으면 한동안 잔상이 남는다. 종일 시달리다 귀가하면 부스팅된 두뇌를 비우기 쉽지 않다. 오늘 만난 진상, 내일 처리할 27개의 메일에서 도피하려면 몰입할 그 무엇이 필요하다.
몰입의 대상으로 김쌤은 게임을, 윤쌤은 유치뽕짝 로맨스를 택했다. 나에겐 추리물이 1차 선택지다. 기왕이면 사회파 미스터리나 심리스릴러보다, 순수하게 범인을 밝히기 위해 달려가는 정통 미스터리가 좋다. 추리물의 고전적 공식인 “Who done it? (누가 범인인가)”,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를 따라가다 보면 머리가 깨끗해진다.
생각할수록 ‘미스터리’라는 장르 자체가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다. 진실을 탐구하고 찾으려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철학, 과학이 발전하고 문명을 이룩했다. 이런 탐구심이 넘치다 못해, 가상세계에서 범죄를 일으키고 진실을 찾으면서 즐기는 추리물까지 만들어냈으니 참 징하다.
고전적 탐정의 대명사인 셜록 홈즈가 활동한 지 10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할아버지의 이름을 거는 김전일이 나이 안 먹는 고교탐정으로 활약하고, 명탐정 코난이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 외칠 때 쾌감을 느끼는 걸 보면 미스터리 추구는 인류에 내재된 보편적 정서가 맞나 보다.
*미스터리를 풀거나 퍼즐을 맞출 때 얻는 창조적 통찰이 뇌 보상 체계를 활성화해서 마약을 투여할 때와 비슷한 쾌감을 준다는 연구도 있다.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이런 보상을 얻는 선택된 이들은 덕후가 된다.
2019년 개봉한 [나이브스 아웃(Knives out)]’과 [머더 미스터리(Murder mystery)]는 “Who done it?’, “Cui bono?”를 정공법으로 따라가는, 오랜만에 보는 고전적 추리극 형식의 영화다.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부호가 의문의 살인을 당하고 유산상속을 둘러싼 아귀다툼이 벌어진다는 점,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탐정∙경찰이 등장하는 설정도 비슷하다.
두 영화 모두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나이브스 아웃]에는 007로 유명한 다니엘 크레이그, 캡틴 아메리카로로 미국뿐 아니라 지구를 지킨 크리스 에반스가 출연한다. [머더 미스터리]의 주연 배우는 친근한 이미지의 아담 샌들러와 제니퍼 애니스톤이다. 유산 다툼을 벌이는 조연들도 영화에서 한 연기, 한 경력 하는 배우들이다.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분위기나 디테일은 완전 대조적이다. [나이브스 아웃]이 우아하게 잘 짜여진 추리극이라면 [머더 미스터리]는 경박한 유머로 가득한 코믹 미스터리다. 한 인물의 왕자와 거지 버전 같다. 한식 메뉴라도 고급진 한정식과 우리 동네 조미료 맛집 백반만큼 다르다.
[나이브스 아웃]의 주인공, 살해당한 부호의 간병인 마르타는 가난한 이민자 출신이며 성실하고 똑똑하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주인공이다. [머더 미스터리]의 닉과 오드리 부부는 서민적인 푼수떼기다. 유럽에 관광간 경박한 미국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닉이 비행기 안에서 좌석(이코노미석!)을 눕히고 진상짓하는 걸 보면 남 이야기 같지 않다. 범인을 쫓다가 미국과 차선이 다른 걸 잊고 고급차라며 신나게 우핸들 차량을 잡아타는 바람에, 얼떨결에 경찰인 닉 대신 미용사 오드리가 운전하며 카레이싱을 벌이기도 한다.
또 하나. 두 영화 모두 공통적으로 약물이 중요하게 등장하지만, 성분이나 이용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한정식집 모르핀
[나이브스 아웃]에서 살인에 이용한 도구는 모르핀이다. 어깨 통증에 시달리던 부유한 작가 할란은 두 가지 진통제, 케토톨락과 모르핀을 투여하고 있다. 케토톨락(ketotolac)은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이며 모르핀은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다. 간병인 마르타는 두 약제의 병을 착각해 3mg씩 투여하던 모르핀을 케토톨락인 줄 알고 과량 투여하고 만다. 모르핀은 중독성이 있을 뿐 아니라 과량 투여하면 호흡곤란, 혼수상태, 사망으로 이어진다. 이를 막으려면 10분 이내에 해독제인 날록손을 투여해야 하지만 집에는 없고, 구급차를 불러도 수분 안에는 안 올 것이고… 급기야 사건이 벌어진다.
아, 물론 이것이 사건의 전부는 아니다. 뒤에 더 많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날록손(naloxone)은 모르핀 및 아편류 마약제를 과다복용했을 때 응급 투여하는 일종의 해독제다. 급성마약을 과량 투여했을 때 진단 목적으로도 사용한다. 모르핀은 체내에서 수용체에 결합하여 작용하는데, 날록손이 그 수용체를 선점하면 모르핀이 결합하지 못하므로 호흡마비와 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막을 수 있다. 한 연구에서는 날록손의 역전 효과가 75-10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모르핀이 수용체에 결합하기 전에 빨리 투여해야 한다.
동네 백반집 비염약
[머더 미스테리]에서 오드리는 알레르기 때문에 클라리틴을 사오라고 하지만, 닉은 1달러 더 싼 알레그라를 산다(정말 쪼잔하다). 오드리는 짜증을 내고, 닉은 같은 약인데 뭘 구분하냐며 타박한다.
엄밀하게 두 약은 다르다. 클라리틴의 성분은 로라타딘(loratadine), 알레그라는 펙소페나딘(fexofenadine)이다. 둘 다 기존 항알레르기약의 부작용인 졸음 증상을 개선한 2세대 항히스타민제로 알레르기나 비염에 사용한다. 펙소페나틴은 간대사가 적고 부작용의 우려가 다소 낮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두 약 모두 성인이라면 1일 1회 복용한다. 금기가 없는 한 알레그라를 복용해도 문제될 것 없는데, 그저 두 사람의 성격을 보여 주는 장면일까?
어쩐지 복선의 냄새가 난다. 항알레르기/비염약으로 살인하긴 힘들텐데, 뭘까? 1세대 항히스타민제라면 졸음의 부작용이라도 있으니 뭔가 꾸밀 수 있겠지만, 2세대 약은 약하다.
아, 물론 살인 도구가 되지는 않지만 이 약이 나중에 모종의 역할을 하긴 한다.
잠깐의 실수로도 치명적인 모르핀 vs 구하기 쉽고 위협적이지 않은 비염약. 이 두 영화의 성격을 딱 보여준다. [나이브스 아웃]은 잠깐 딴짓하면 도통 따라가기 힘들지만, [머더 미스터리]는 일시정지 안 누르고 화장실 다녀와도 즐기는 데 문제 없다. 비염약 영화에서 대놓고 찌질한 캐릭터들이 벌이는 유치한 개그에 키득거리다 보면 어느새 끝까지 달려가 범인을 잡는다.
모르핀 영화 [나이브스아웃]의 주연 배우들은 주가 상승 중이거나 최고치를 찍은 배우들로, 자신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에 들끓는 것 같다. 비염약 영화 [머더 미스터리]의 아담 샌들러와 제니퍼 애니스톤은 전성기를 지나 큰 욕심 없이 코믹 연기를 즐기는 듯하다. [프렌즈]에서 세련된 이미지로 인기를 구가했던 제니퍼 애니스톤이 건강한 아줌마 캐릭터를 소화하는 모습도 친근하고 편해 보인다.
정갈한 한정식이야 언제나 고맙지만 부스스한 머리에 추리닝 차림이라면 동네 백반집이 더 편하다. 꽉 짜여진 95점짜리 미스터리냐, 통화하며 봐도 부담없는 구멍 숭숭 조미료 송송 코믹 미스터리냐. 오늘 내게 주어진 순수한 몰입의 시간을 단단하게 쓸지, 느슨하게 쓸지에 따라 선택해 본다.
*모르핀만큼 극적이진 않지만, 비염약도 몹시 중요하다. 알레르기성 비염의 괴로움을 겪어 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참고문헌
Oh Y, et al. Neuroimage. 2020 Jul 1;214:116757.
Lynn RR, Galinkin JL. Ther Adv Drug Saf. 2018 Jan; 9(1): 6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