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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페로 Dec 01. 2020

여러분, 알코올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최종분석’ – 감기약 살인

24세 최군은 신체 건강한 대학생이다. 어느날 맥주 두 잔을 마신 후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엄마 아빠가 위험해! 구해야 해!”


병원으로  이송된 최군, 문을 꼭 닫고 커튼을 쳐서 창문을 가려달라고 요구한다. 간호사가 불을 켜자 소리를 질러댄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아버지를 불러댄다. 아버지가 대답하지 않으면 극도로 신경질적이 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다.


MRI 결과 뇌에서 이상 소견은 나타나지 않았다. 혈액 검사에서도 특별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과거에 정신병으로 진단된 적도 없고 스트레스나 트라우마로 고통받은 것도 아니다. 약물을 남용한 적도 없고 습관적으로 음주하는 사람도 아니다. 지난 3개월간 한두 번 마셨을 뿐이다.


최군은 항정신병약제를 투여받고 호전되서 일주일 후 집에 돌아갔다. 의사는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판단했고, 최군은 별다른 증상 없이 학교에 잘 다녔다.


40일 후 그 증상이 다시 나타났다. 최군이 가족들과 맥주 반 잔 정도 마신 후의 일이다. 3일 정도 후에 완전히 회복되었지만 3일간의 기억은 없다.


고작 이 정도 마시고 벌어진 일이다.


최군의 이야기는 실화에 기반한다. 2016년  Neuropsychiatr Dis Treat에 게재된 사례 보고(case report)의 내용이다. 알콜 남용이나 의존증과 관련해서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는 사례는 꽤 흔해서 어떤 연구에서는 50%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된다. 알코올에 대한 내성이 없는, 한 마디로 술을 잘 못 하는 사람이 소량의 음주로 갑작스럽게 공격성이나 이상 증상을 나타내는 경우도 간혹 보고된다. 병적 알코올 중독(pathological alcohol intoxication, alcohol idiosyncratic intoxication)이라고 한다.


늘 그렇듯 이런 특이한 병적 상황은 흥미로운 소재다.


최종분석. 지금은 네이버에서 볼 수 있다.

1992년 영화 ‘최종분석(Final analysis)’은 감기약을 마시고 남편을 살해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킴 베이싱어가 분한 헤더는 소량의 알콜 섭취로도 발작 및 정신이상 증상을 보이는 병적 알코올 중독(pathological alcohol intoxication)으로 진단된 적이 있다. 그녀는 강압적인 남편에게 학대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다. 어느 저녁 몸이 좋지 않아 감기약을 복용한 헤더는 남편의 머리를 향해 아령을 휘두르고 만다.


이게 다 감기약 때문이다.


시럽 형태의 감기약은 에탄올을 함유한 경우가 많다. 의약품 제조 시 에탄올은 훌륭한 용매이기 때문이다. 정제나 캡슐의 경우 에탄올이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물 없이도 쉽게 삼킬 수 있고 목에 걸릴 일 없는 시럽제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다. 제품마다 에탄올 함량도 다양하다. 물론 영유아 대상의 시럽은 에탄올 프리다.  

 

*미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대표적인 감기약, 나이퀼(NyQuil)의  종합감기약 버전에는 덱스트로메토르판(dextromethorphan)이 포함되어 있다. 국내에서도 종합감기약에 포함된 이 성분은 졸음, 어지러움 등 중추신경계 부작용이 있고 남용의 우려가 있어 단일제제는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종합감기약 나이퀼 리퀴드. 10% 에탄올이 함유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병적 알코올 중독’은 명확하게 정의된 질병이 아니고, 검사로 특정할 수 있는 병리적 증거도 없다. 이 때문에 헤더가 무죄인지 유죄인지 여부를 두고 법정 공방이 벌어진다. 의학자들 간에 과연 이 병이 존재하는 질환인지 논란이 벌어진다. 그녀의 운명은? 두둥!


포스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헤더는 팜므파탈이다. 영화 중반부에 이르면 그녀가 병과 약을 이용하는 영리한 여성임을 눈치챌 수 있다. 이런 류의 범죄는 장기간의 준비와 치밀한 연기가 필요하다.  


통상적으로 픽션에서 병적 상태나 독극물을 활용해서 범죄를 꾸미는 것은 여성, 아니면 약자다. 실제로 여성이 독살 등 계략 범죄에 능하다는 통계자료는 없지만,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신체적· 사회적 약자일수록 더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이나 ‘사이드 이펙트’의 루니 마라가 떠오른다.

 

프라이멀 피어. 리처드 기어는 이런 영악한 범죄자들에게 이용당하는 남자 전문인가.

헤더는 팜므파탈이지만 남성에게 착취당한 경험이 있기에 연민을 느끼게 하는, 꽤 입체적인 캐릭터다. 경제적·사회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기에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서 원하는 걸 쟁취하는 여성이라는 20세기 스테레오타입을 엿볼 수 있다. 남성 입장에서 매혹적이면서 공포스런 존재다.


8마일에서 에미넴 엄마로 나온 킴 베이싱어(김 배신자라고). 지금은 중후한 연기파 이미지지만 한 때 섹시스타였다.


알코올은 이렇게 위험하다. 만성적 알코올 중독만 해로운 게 아니라, 이렇게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도 위험하다. 소량이나 적당량(남성 3잔, 여성이나 노인은 2잔)의 음주가 심혈관계 위험을 다소 낮춘다는 보고가 있지만, ‘적당량’의 기준도 논란이 있다. 적당량이 과량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고. 적당한 음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서 얻는 이득(benefit)이 큰지, 건강상의 위해(risk)가 큰지? 담배와 마찬가지로 알코올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계속 따져봐야 하는 복잡한 문제다.


영화 '최종분석'은 우아하게 샴페인을 마시는 장면으로 끝난다. 알코올이 기승전결을 책임지는 영화다. 최군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헤더처럼 누굴 해칠 우려도 없고 건강검진 수치도 좋으니, 한잔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감기약 복용 후 음주는 간에 무리를 주지만 지금 먹는 약도 없으니 정당화하기 딱 좋다.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까지 만들어 주는 알코올은 그야말로 매혹적인 1급 발암물질이다.


랜선 앞에서 한잔 할까?


야옹이까지 가세하는 알코올의 유혹. 한잔?





참고문헌  

Da-Li Lu, Xiao-Ling Lin. Neuropsychiatr Dis Treat. 2016; 12: 2449–2454.

VICKS. FAQS NyQuil. https://vicks.com/en-us/safety-and-faqs/faqs/vicks-nyquil-f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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