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이펙트’ - 항우울제와 몽유병
일본에 사는 대학생 쇼코. 살고 싶은 의욕이 없다. 하루의 대부분 무기력하게 보낸다. “가끔씩 정신이 맑아질 떄는 내가 내 정신을 연료로 타오르는 불처럼 느껴졌다.” 약물 치료를 시작했는데, 멍한 상태다. 한국 친구가 찾아와서 쇼코의 행동에 화를 내지만, 기분나쁘지도 섭섭하지도 않다.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독일에 거주하는 엄마. 아빠와의 관계는 이미 오래 전에 평행선이 되었다. 외로운 타국에서 그나마 마음을 열었던 베트남 친구와 소원해졌다. 새벽에 딸이 화장실 가러 일어나면 엄마가 식탁 의자에 멍하니 앉아 벽을 보고 있다. 주말이면 마켓이나 숲으로 나들이하던 사람이 벽만 보고 누워 있다. 아빠가 신경을 건드리면 이전 같으면 맞받아쳤을 텐데 지금은 그저 침묵한다. 딸은 두렵다. “엄마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더 멀리 가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최은영의 단편소설 ‘쇼코의 미소’와 ‘씬짜오, 씬짜오’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소설의 등장 인물, 특히 여성에게 종종 부여되는 병적 특징이 우울증이다. 누군가는 죄다 우울증이라고 투덜거린다. 그만큼 실생활에서 많이 접하고 픽션에서도 잘 인용되는 병이다. 2019년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이 79만 명 이상이다. 이 중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2배 더 높다. 비교적 잘 알려진 병인데다 정신 증상의 비중이 높기에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편리한 도구다.
이야기에서 우울증은 인물을 설명할 뿐 아니라 범죄 그 자체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병 자체가 성격이나 행동을 변하게 하고, 무엇보다 항우울제라는 약물의 특성 때문이다.
영화 ‘사이드 이펙트(Side Effect)’는 제목이 내용 그 자체다. 말 그대로 약의 부작용이다.
28세 에밀리는 감옥에서 갓 출소한 남편과 살고 있다. 삶에 의욕이 없던 그는 어느 날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과 의사 뱅크스의 진료를 받는다. 항우울제를 처방받았지만 효과도 없고, 부작용 때문에 불만스럽다. 뱅크스는 에밀리에게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며, 임상시험 중인 신약 ‘아블릭사(Ablixa)’를 처방한다. 새로운 약을 복용하고 증상도 좋아지고 한층 만족스럽지만 단 하나, 부작용으로 몽유병을 겪는 게 흠이다. 어느 날 그녀는 몽유병 상태에서 남편을 칼로 찌르고 만다.
중반부쯤 되면 대부분 눈치챌 것이다. 포스터의 눈빛부터 스포다. 에밀리는 치밀한 범죄자요, 영민한 연기자다. 우울증이 없지만 환자처럼 행동했고, 항우울제를 복용한 적 없지만 약의 부작용을 흉내냈다.
실제로 항우울제를 투약한 일부 환자에서 불안, 초조, 성욕 감소 등 이상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에밀리는 이런 이상반응 프로파일과 특징을 완벽하게 숙지한 우등생이다.
아블릭사는 가상의 약제다. 영화에 등장하는 약 중 실재하는 항우울제인 졸로푸트(sertraline)와 같은 계열인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 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로 묘사된다. 세로토닌은 행복감 등 감정을 느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세로토닌 수치가 낮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SSRI를 투여하면 분비된 세로토닌이 재흡수되는 것을 억제해서 뇌의 세로토닌을 증가시켜 준다.
현실에서 SSRI와 같은 항우울제가 몽유병을 촉발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 2018년 몽유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약물을 조사한 메타분석(기존 문헌을 모아서 분석하는 방법) 연구가 있다. 조사한 약제 중 수면제인 졸피뎀, 신경안정제인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이 몽유병과 가장 높은 연관성을 보였고, SSRI 같은 항우울제는 사례 보고에 근거해서 가능성이 있다고 제시되었다. 이런 점까지 이용했다니, 에밀리는 꾀병계의 수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우등생도 자기 꾀에 넘어간다. 에밀리를 의심한 뱅크스가 진실을 고백하게 하는 자백제라면서 주사제를 투여한다. 에밀리는 약효가 나타나는지 나른한 표정으로 묻는 말에 대답한다. 사실 주사제는 식염수였다. 가짜 약, 위약을 주사했는데 지레 효과가 나타난 척한 것. 환자가 아닌 연기자임이 들통나 버렸다.
*아미탈(Amytal sodium)은 진실의 약으로 유명한 최면진정제다. 영화 ‘앤트맨2’의 한 장면처럼 진실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게 하는 약은 아니다. 최면 유사 상태로 만들어 거짓말을 못 하게 하는 쪽에 가깝다. 진정 상태의 뇌로는 거짓말처럼 집중이 필요한 고도의 작업을 하기 어렵다. 인간의 기억은 뇌에 사진처럼 입력되지 않고 편집되고 분산되어 저장되기에, 진실의 약이 왜곡된 기억까지 수정해 주지는 않는다.
신체적 변화가 뚜렷하지 않은 정신질환이기 때문에 이렇게 꾀병 환자도 등장한다. 현실에서 환자인양 연기한다면 관심받고 싶어서, 또는 법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이드 이펙트’, ‘최종분석’처럼 영화에서는 질병을 이용하는 인물이 종종 여성으로 설정되지만, 한국에서 꾀병 환자는 남성의 비중이 더 높지 않을까 싶다. ‘징병제’라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관련 통계 자료는 없다)
지금의 우울함이 약물 치료를 요하는 병적인 우울증인지 아닌지 비전문가가 딱 잘라 판정하기는 쉽지 않다. 우울함과 우울증 간에 명확한 벽이 세워져 있지는 않다. CES-D 척도(Center for Epidemiologic Studies Depression Scale)와 같은 자가진단 도구를 사용해서 스크리닝할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스크리닝이다. 우울증인지 의심된다면 전문의에게 진료받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혈액검사나 조직검사를 통해 확인되는 병이 아니다 보니, 어떤 이들에게는 엄살이나 나약함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그런 호사스러운 생각을 하느냐.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하지 않겠냐.” 자살 시도한 쇼코에게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다. 우울증이 치료를 요하는 병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정신력을 강조하는 사람은 아직 많다. 현실에선 우울증을 이용하는 에밀리보다 우울증을 덮으려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
예전에 절친이 꽤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치료받았다고 고백해서 충격받은 적이 있다. 자주 만나던 친구였고 이전에도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 명랑하고 단순한 나는, 가족의 죽음 같은 거대한 사건이 없는 친구의 힘듦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청춘의 찰과상 정도라고 여기고, 표피성 위안만 던진 채 잊고 있었다. 그의 아픔이 찰과상이 아니라 자상이었음을 뒤늦게 알고 내가 상처의 아묾을 늦춘 건 아닌지 곱씹었다. 엄살이라고, 그냥 우울함이라고 지레 편리하게 재단한 내 속좁은 사고의 틀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했던 걸까.
“자신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엄마는 생각했다.”
- 최은영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중
참고문헌
건강보험공단. 2015~2019년 건강보험 우울증 연령별 성별 진료 현황
Stallman HM, Kohler M, White J. Sleep Med Rev. 2018 Feb;37:105-113.
보건복지부. 2019 자살예방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