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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페로 Feb 05. 2021

비아그라, 악당 아닌 조력자

영화 ‘제럴드의 게임’ – 비아그라에 대한 오해

제약∙바이오 업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최초로 승인된 코로나19 백신의 개발제조사인 화이자는 원래도 공룡이었지만, 이제 거의 고질라급이 된 듯하다. 비아그라를 만든 회사라면 백신 정도는 거뜬하지 않겠냐(…)는 농담도 돌고 있다. 아, 아재들~~


비아그라(sildenafil)는 한국에서 1999년 승인됐다. 약 자체도 이슈였지만, 젊은 여성 PM (product manager)이 마케팅을 책임진다는 점도 화제였다. 지금이야 특이할 것 없지만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파란 다이아몬드 같은 정제 형태를 활용한 판촉 활동도 활발했다. 적응증에서 느껴지는 공격적인 이미지를 상쇄하는 팬시한 파란색 판촉물들이 기억난다.


정제 형태를 활용한 파란 메모지가 꽤 예뻤다.

특수한 적응증 때문에 비아그라는 영화의 소재로 종종 등장한다. ‘러브 앤 드럭스(2010)’는 비아그라 영업사원이 주인공인 로맨스 영화이고,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2003)’에서는 이 약이 코미디를 담당했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 협심증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해리(잭 니콜슨). 의사는 치료제를 투여하기 전에 비아그라 복용 여부를 묻고, 해리는 거짓말하며 부정한다. 애인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비아그라를 복용한 사람은 협심증 치료제인 니트로글리세린이 금기다. 이런 질산염 제제는 혈관을 확장시켜 심장으로 가는 혈액과 산소 공급을 증가시키는데,  비아그라는 이 효과를 강화시켜 혈압이 과도하게 저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가 다행이라면서 니트로글리세린을 막 투여하는 와중에 설명을 듣고 질겁하는 해리.   

로맨스와 코미디를 당당한 비아그라


로맨스, 코미디 장르를 섭렵한 비아그라. 다음으로 등장한 ‘제럴드의 게임(2017)’은 어둡고 심각하다. 이 영화에서 비아그라가 악역을 맡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이번 장르는 공포/스릴러

스티븐 킹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제럴드의 게임’은 제시가 나이 지긋한 남편 제럴드와 함께 외딴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면서 시작한다. 이 부부는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하고, 분위기를 잡기 전 남편은 비아그라를 복용한다. 색다른 시도를 한답시고 제시의 양 손에 수갑을 채우고 침대 헤드에 묶는 제럴드. 이래놓고 바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제시의 양 손은 묶여 있고 휴대폰은 멀리 떨어져 있다. 한적한 곳이라 오가는 사람도 없다. 휴가 중이라 며칠간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다. 바닥엔 남편 시체가 있고 열린 문을 통해 굶주린 개가 침실에 들어온다. 정신이 혼미해진 제시의 눈에 일그러진 얼굴을 한 사신의 환영이 보인다. 미치는 상황이다. 이 영화는 밀실 공포스릴러다.


옴짝달싹 못 하는데 이런 형체도 보인다.

영화 리뷰에서 제럴드가 비아그라 때문에 사망했다는 글을 읽었다. 하지만 비아그라와 심장마비의 관계는 선후관계지 인과관계는 아니다.


1998년 FDA에서 최초로 허가된  비아그라의 성분 sildenafil은 혈관 평활근을 이완시켜 혈압을 낮춘다.  원래 협심증 치료 목적으로 연구되었지만 정작 심장에 대한 작용은 약하고, 말초혈관을 확장시켜 성기에 혈액이 몰리게 하여 발기를 촉진하는 효과가 발견되어 완전 새로운 적응증으로 탄생한 약이다.  


비아그라의 성분  Sildenafil

시판 초기에는 비아그라가 심장질환의 위험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비아그라를 복용한 남성들에서 심근경색증, 돌연사가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원래 심혈관계 위험요인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2003년 리뷰 연구에서 비아그라는 심혈관 위험성 증가와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에도 임상 결과나 시판 후 자료로 볼 때 이 약이 특별히 심장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사실 심혈관질환이 있으면 발기부전이 동반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비아그라를 복용한 사람 중 원래 심장이 좋지 않은 사람의 비율이 높다고 봐야 한다. 원인을 혼동하기 쉬운 것이다. 영화에서도 후반부에 제럴드는 원래 심장질환이 있었다고  밝혀진다.

*2014년 메타 분석에서는 비아그라가 심장보호효과를 보인 것으로 제시되었다. 약 입장에서는 억울할지도…


‘제럴드의 게임’에서 비아그라는 악역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조력자 노릇을 한다. 침대에 묶인 채 탈수로 지쳐가던 제시는 머리맡에 놓인 한 잔의 물로 견딘다.


아니 물컵,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제럴드는 비아그라를 복용하고 나면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아그라 제품설명서 중 부작용 목록에 ‘목마름(구갈)’이 있다. 꼼꼼한 설정 같으니라고.  


하필 거기에 있는 물컵. 이게 다 비아그라 때문이라는 설정.

포스터만 보면 오해하기 딱 좋지만 이 영화는 선정성과 거리가 멀다. 스릴러의 외피를 띠고 있지만, 나약했던 여성이 육체적∙심리적 속박에서 탈출하고 독립하는 과정을 직설적으로 보여 주는 심리극이기도 하다. 제시를 묶은 수갑은 물리적 구속이면서, 자신을 착취하는 남성들에게 의존하도록 스스로 채워 둔 심리적 구속이다.


제시를 수갑에서 풀어준 건 누구일까? 지나가던 백마탄 왕자가 그녀를 극적으로 구해주길 바랐지만, 바로 깨달았다. 그것이야말로 인생이 기적을 통해 저절로 굴러가리라 믿었던 나의 철부지 같은 마음이었음을.


구원이나 자유는 누워서 칭얼거리면 알아서 찾아오는 달콤한 선물이 아니다. 살을 찢고 피흘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상처 가득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나약한 소녀에서 독립적인 인간으로


참고문헌

Tran D, et al. Drug Saf. 2003;26(7):453-60.

Jackson G, et al. Urology. 2006 Sep;68(3 Suppl):47-60.

Giannetta E, et al. BMC Med. 2014 Oct 20;12: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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