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니 그리고 ‘더 록’
2021년 1월 8일. 최저 기온 서울 영하 19도, 모스크바 영하 6도? 최고 기온 서울 영하 11도, 모스크바 영하 3도?
이야, 러시아 별거 아니구나! 추운 나라일수록 전통주 도수가 높은 경향이 있는데 우리나라도 보드카 뺨치는 독주 개발해야 하는 거 아닌가? 출근길에 툴툴거리며 뻘생각하는 날카로운 겨울이었다.
2021년 겨울, 모스크바는 서울보다 기온도 높지만, 코로나19를 무색하게 하는 집회의 열기가 한창이었다. ‘알렉세이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나발니는 야당인 ‘미래의 러시아’를 이끄는 정치인이자 블라디미르 푸틴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의 대표주자다. 유럽에 있던 나발니는 2021년 1월 17일 러시아에 입국하자마자 체포되었다.
이 사람에 유독 관심가진 이유는 ‘나발니 독살 시도 사건’ 때문이다. 2020년 8월 20일, 그는 비행기에서 독극물 중독 증상을 보였고 독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고 깨어났다. 정황상 공항에서 차를 마시다 유독성분에 노출된 듯하다.
독극물의 정체는 노비촉(Novichok agent) 계열로 밝혀졌다.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 살해에 사용된 VX보다 훨씬 강력한 신경독성물질이다. 노비촉은 1980년대 개발되었지만, 물리화학적 성상이나 제조 방법에 대힌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노비촉에 노출되면 호흡곤란, 발작이 일어나고 심할 경우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사망한다. 경구, 흡입뿐 아니라 VX처럼 피부로도 흡수된다. 김정남도 낯선 사람이 다가와 얼굴에 바른 VX 때문에 사망했다. 노비촉은 액체 형태가 있고 고체(분말 형태)도 제조된다는 보고가 있으니 수송도 용이해 보인다. 아무리 강력한 독극물이라도 안정성(안전성 아님)이 떨어져서 금새 산화되어 효력을 잃으면 사용가치가 떨어지겠지만, 요놈은 밀폐용기에서 몇 달 이상 독성이 지속된다.
무색, 무취로 구별하기 어려운데다 피부접촉으로도 흡수되니, 자가격리하고 외부인을 차단하기 전까지는 예방하기 어렵다. 노출된 후 대처 방법으로는 피부를 닦는 등 오염물질 제거, 산소 공급, 심폐소생 등이 있다. 치료 약물은 항콜린제(아트로핀), 항경련제, 아세틸콜린 재활성화제(oxime) 등이다.
이 중 아트로핀(atropine)이 눈에 띈다. 영화 ‘더 록’을 본 사람이라면, 테러리스트들이 살포한 VX 에 노출된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사제를 가슴팍에 뙇! 꽂는 장면이 기억날 것이다. 그 약이다.
노비촉의 독성 기전은 더 연구할 필요가 있지만, 콜린에스터라제 억제제(cholinestrase inhibitor)로 작용한다. 인체에 존재하는 아세틸콜린(acetylcholine) 은 부교감신경을 관장하여 심박수가 과도하게 증가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작용을 한다. 이 물질은 효소인 콜린에스터라제에 의해 분해된다. 이 효소가 없으면 아세틸콜린이 과도해져 심박수가 감소하고 근육 마비, 호흡 저하로 이어진다. 노비촉은 이 효소를 억제해서 아세틸콜린을 증가시키고 혼수상태, 심하면 사망까지 이르게 한다.
노피촉의 해독제인 아트로핀은 부교감신경 차단제로 콜린에스터라제가 억제된 상태에서 투여하면 아세틸콜린 수용체를 차단하여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막는다. 물론 독극물에 노출된 후 최대한 빠르게 투여해야 한다.
현실에서 나발니는 독일 병원에 이송되어 아트로핀을 투여받았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치료법이 시행되었으니 아트로핀이 단독 공신은 아니다. 이 사례는 2020년 12월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신속하게 말이다.
VX 역시 노비촉처럼 콜린에스터라제를 억제해서 작용하기에 해독제로 아트로핀을 사용한다. 김정남도 평상시 아트로핀을 휴대했다고 한다. 이런 류의 암살에 대비했던 것 같지만 사용하기도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더 록에서 니콜라스 케이지는 테러리스트와 싸우다가 VX에 노출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을 극적으로 해결한다. 휴대한 아트로핀을 신속히 주사했기 때문이다. 긴장감이 최고도에 달한 장면이다.
(초록색의 액체 형태인 VX가 순식간에 기화하면서 퍼지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무색이고 빨리 기화하지도 않는다. 영화적 과장이다)
아트로핀은 이렇게 해독작용이 있기 때문에 비상시에 대비해 응급의약품 키트에 구비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더 록’처럼 심장에 투여하는 방법은 근거가 없다. 실제로는 허벅지나 엉덩이에 근육주사하도록 권고한다.
아무래도 궁둥이보다 가슴을 찔러야 관객의 가슴을 철렁하게 할 수 있으니 현명한 영화적 거짓말이다. 극 초반 케이지는 주사 공포증이 있는 설정이었는데, 자기 목숨을 구하면서 공포증도 극복했으니 캐릭터와 극을 모두 살린 훌륭한 전개다. 1996년 개봉작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액션, 스토리 모두 잘 짜여진 재미있는 영화다.
살해 방법 중 유독 고풍스런 뉘앙스를 풍기는 ‘독살’은 21세기에도 이렇게 형태를 바꾸어 지속되고 있다. 국제적 유력 인사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로렌스 블록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800만 가지 죽는 방법' 중 최소한 암살은 피할 수 있지 않은가? 평범하게 죽어가는 인생으로서 정치적 독살이 세상에서 없어지기를.
참고문헌
Chai PR, et al. Toxicol Commun. 2018; 2(1): 45–48.
Steindl D, et al. Lancet. 2021 Jan 16;397(10270):249-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