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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페로 Feb 19. 2021

화학 시련자를 위한 독살 맛집

'Y의 비극’ – 피조스티그민

고등학생 시절 화학을 끔찍히 싫어했다. 좋아하는 과목이 따로 있던 건 아니다. 수많은 불호 과목 중 조금 더 싫은 과목이었다. 이런 주제에 아무 생각 없이 화학의 비중이 높은 학과를 선택했고, 그 결과 장렬하게 전사...즉 F를 받고 말았다. 


이공계 과목 중에서도 암기의 비중이 높은 화학은 내겐 쥐약이었다. 특히 무기화합물을 외울 때는 시련 재판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 시련을 이겨내야  대학생으로 인정받으리라. 견뎌라!


시련 재판(trial by ordeal)은 피고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해서 그 결과로 유무죄를 판단하는 재판이다. 중세에는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을 물에 넣어 떠오르면 유죄, 가라앉으면 무죄로 판정했다. 이 요상한 행위에는 불, 물, 끓는 기름 등 다양한 도구가 동원됐다. 물론 ‘독’도 있다.


칼라바르 콩. Physostigma venenosum.



1845년 영국의 한 식물학자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남부 칼라바르(Calavar)에서 이루어지는 흥미로운 재판에 대해 보고했다. 피고에게 에쎄르(esere)라는 식물의 즙을 먹이고 죽으면 유죄, 독이 퍼지기 전에 토해서 살아남으면 무죄라는 식이다. 영국에서는 이 식물을 칼라바르 콩(Calabar bean)이라고 칭했다.


솔로몬 뺨치는 에쎄르의 신속한 판결에 대해 나름의 가설이 있다. 무죄인 사람은 거리낌없이 한번에 삼키기 때문에 토하고, 유죄인 사람은 죽을까 두려워서 천천히 마시키에 독이 흡수되어 죽는다는 것이다. 더 냉정한 주장도 있다. 칼라바르 콩은 싱싱할수록 구토 효과가 강하다. 족장이나 사제 같은 높은 분들이 피고에게 싱싱한 놈을 줄지, 마른 놈을 먹일지 사전에 정해 두었을 수도 있다.   


1864년에는 칼라바르 콩에서 알칼로이드 성분인 피조스티그민(physostigmine)이 분리됐다. 이 약물은 인체의 아세틸콜린 분해효소인 콜린에스터라제를 가역적으로 억제해서 아세틸콜린의 농도를 높여 주는 부교감신경 활성화제다. 아트로핀과 같은 항콜린제의 독성에 길항작용을 나타내고, 녹내장 치료 효과가 있다. 과량으로 투여하면 심정지,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피조스티그민은 의약품으로 활발히 연구되었지만, 한편으로 20세기 초반 추리소설의 단골손님이기도 했다. 물론 치료제가 아닌 독약의 신분으로 등장한다.  


엘러리 퀸의 1932년작 ‘Y의 비극’은 미치광이 해터 집안(Mad Hatter)에서 일어난 범죄를 다룬다. 손에 꼽히는 재력, 거기에 하나같이 고약한 성격으로 유명한 이 가문에서 청각·시각 장애인인 루이자를 노린 독살 미수 사건이 벌어진다. 이어서 집안의 폭군인 노부인 에밀리 해터가 살해된다. 집에 있는 모두가 용의자인 상황이다.  


이 소설 한 편에 스트리크닌(strychnine), 염화제이수은(HgCl2.) 피조스티그민이 등장한다. 독살계 스타 총출동이다. 에밀리 해터의 죽은 남편 요크 해터가 화학자여서  집안에 실험실을 꾸리고 온갖 화학물질을 구비해 두었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완벽한 독살 맛집인 셈이다. 이 중 결말 부분에서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스타가 바로 피조스티그민이다. 해터가의 마지막 살해 시도에 사용되는 독이자 범인을 잡는 약이다.

 

피조스티그민의 구조식

피조스티그민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커튼’에도 등장한 단골 악당이다. 현실에서는 항콜린제 중독을 치료하는 해독제로 사용된다. 자살 목적으로 diphenhydramine 150정을 복용한 환자에 피조스티그민을 투여해서 회복시킨 사례가 2020년에 보고되었다. 이 약은 기억 증진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알츠하이머병의 치료제로 연구되기도 했다. 임상에서 치매 치료에 유용성이 없다고 평가되었으나, 피조스티그민의 구조를 변경한 리바스티그민이  현재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로 사용된다. 오래된 녹내장 치료제이지만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제가 많아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으니, 정말 큰 일이 아니면 만나기 힘든 추억의 그가 된 셈이다.

 

Y의 비극은 역대 추리소설 3대장처럼 출처를 알 수 없는 랭킹에 단골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만큼 탄탄하게 지어진 고전 오브 고전이다. 1932년에 등장한 이 소설의 트릭, 범인은 전에 없던 새로운 그 무엇이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와 더불어 집안 싸움 미스터리를 공식처럼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무척 부유하고, 적당히 불행하고, 상당히 미친 인간들의 싸움질을 보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려주었다고나 할까.

*지금 읽으면 해터 집안 식구들이 고약할지언정 크게 미친 사람들처럼 보이진 않는다. 엘러리 퀸이 넷플릭스를 본다면 기절할지도.

이런 집안 싸움 추리물이 'Y의 비극'의 후손격이라 할 수 있다.


왕년의 화학 시련자는 요크 해터의 실험실이 흥미롭다. 18-19세기 서구 열강은 제3세계에서 많은 동물, 식물, 약물을 수집했고, 20세기 초까지 생의학, 화학 분야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용할 수 있는 약물과 독물의 폭도 넓어졌다. 지금으로 치면 웹소설처럼 인기를 구가하는 대중 장르였던 추리소설에서는 이들 무기를 신나게 사용했다. 코난 도일은 새로운 생물종과 외국에서 들여온 약물을 적극적으로 등장시켰다(지금 보면 비과학적인 설정 투성이지만 어쨌든 멋진 실험가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보다 현실적으로 독약을 활용했다. 엘러리 퀸은 소설에서 아예 실험실을 만들고 독살 맛집을 차렸으니, 참으로 호쾌하다.


화학 시련자는 어찌어찌 재판을 견디고 죄를 벗었다. 시련 재판에서 살아남은 자의 여유를 갖고 보니, 알수록 흥미롭고 실용적인 학문이 화학이다. 고딩 때는 왜 그리 재미없었을까? 화학쌤이 요크 해터의 실험실로 수업했다면 어땠을까? 공부는 싫고 미스터리는 좋은 어느 게으른 학생이 조금 더 일찍 화학 시련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사족]

‘Y의 비극’은 한국에서 단편 드라마로 각색해서 방영한 적 있다. 원작을 읽지 않은 어린 시절, 꽤나 충격적인 반전으로 각인되었다. 후에 소설을 읽고 나서 드라마는 소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한 번 더 꼰 결말임을 알았다. 한국판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루이자 역을 정혜영이 연기했다. 원작을 생각하면 과도하게 예쁜 연기자지만, 결과적으로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극에서 반전의 키를 쥔 인물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드라마 'Y의 비극'에서는 정혜영 님이 미스터리의 중심이었다.




참고문헌

Blackstone NG, et al. Cureus. 2020 Nov 28;12(11):e11739.

Olyn A. Andrade; Anoosh Zafar Gondal. Physostigmine. StatPearls [Internet]. Last Update: May 25, 2020.

Stanley Scheindlin. Episodes in the Story of Physostigmine. Molecular Interventions. 2010;10(1):4-10.

Arens AM, et al. J Med Toxicol. 2019 Jul; 15(3): 184–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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