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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페로 Oct 13. 2020

외모지상주의를 극복하는 약

테드 창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아이돌 중 누가 예쁜지 친구들과 설전을 벌이다가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까지 이르렀다. 외모지상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미성년 아이돌의 기획사 계약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녀석 왈 “세상 사람 모두 성형수술시켜 외모를 평준화시키면 어때?”


외모의 평준화라니 흥미롭다! 다만 성형수술이란 아이디어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폭력적인 방법이다. 젠틀하게 합리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났다. 이 문과적 아이디어를 단편소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다큐멘터리’에서 과학적으로 우아하게 구현했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다큐멘터리’가 수록된 단편집


2017년 개봉해서 화제가 된 ‘컨택트(Arrival)’는 테드 창의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해당 소설이 실린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마지막 작품이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다큐멘터리’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외모의 아름다움으로 타인을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칼리그노시아’라는 시술을 의무화하려 한다. 이는 사회적 이슈가 되고 찬반 여부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다. 칼리그노시아에 대한 여러 사람의 입장과 주장을 인터뷰 형식으로, 다큐멘터리처럼 풀어낸 소설이다.


가상의 증상인 칼리그노시아(callignosia), 즉 실미증은 아름다움, 선함을 뜻하는 접두사 ‘calli’와 실인증을 의미하는 ‘agnosia’를 결합한 조어다. 안면실인증(prosopagnosia, 안면인식장애)은 실재하는 증상으로 인지기능은 정상이나 두뇌 특정 기능의 손상으로 사람의 얼굴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브래드 피트도 안면인식장애가 있다고 보도된 적 있다.


칼리그노시아는 안면실인증과 유사하게 뇌의 특정 부분을 억제해서, 사람의 얼굴은 인식하고 구별하지만 특정한 미적 판단은 하지 못하는 상태다. 영희와 철수를 알아보지만 영희가 예쁜지 철수가 못생겼는지 평가하지 못한다. 브래드 피트가 부와 명예를 매우 몹시 잘 누리고 살듯이, 칼리그노시아가 있어도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다. 단지 사람을 미추로 판단하지 못할 뿐.


안면실인증을 고백한 브래드 피트.  칼리그노시아가 상용화되면 그의 매력도...



실미증을 유발하려면 어떻게 할까? 소설에서는 뉴로스태트(Neurostat)라는 가상의 약제를 사용했다. Neuro는 신경을 뜻하는 접두어, stat는 안정시킨다는 뜻이니 신경을 안정시키는 약제임을 알 수 있다. 이 약제를 투여받은 사람에게 헬멧을 씌우고 신호를 보내면 뇌의 특정 부위에 위치한 뉴로스태트를 활성화해서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회로를 차단한다. 이것이 칼리그노시아를 일으키는 방법이다.  


실제 'Neurostat'라는 상품명의 간질(뇌전증) 치료제가 있다. 물론 현실에서 칼리그노시아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도 간질(뇌전증) 등 뇌의 문제로 발생하는 질병 치료에 전기 자극을 이용한 치료법들이 연구개발되고 있다. 물론 대부분 혁신이 그렇듯 실용화까지의 길은 지구 반바퀴에서 몇천 광년 정도로 멀다. 뇌의 특정 부위, 원하는 회로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다른 이상반응이나 병적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 가상의 약제인 뉴로스태트는 이런 난점을 극복한, TPO를 아는 약이다. 제때, 필요한 곳에서, 목적에 맞게 작용한다. 나노기술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뉴로스태트의 구성이나 투여방법은 자세히 기술되지 않지만 ‘나노약제’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나노의약품은 아주 작은 크기의 전달체를 이용해서 약물을 원하는 부위에 도달시켜 작용하게 하는 기술로, 현실에서 항암치료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쓸데없이 다른 부위에 작용하지 않아 작용 효율은 높이면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나노 사이즈의 뉴로스태트를 인체에 주입하면 뇌의 타겟 부위로 이동한다. 투여한다고 바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다. 뉴로스태트는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어 뇌의 어떤 부위에 분포되었는지 매핑이 가능하다. 투여받은 사람에게 헬멧을 씌우고 원하는 부위의 뉴로스태트를 활성화하는 신호를 보내면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회로가 차단된다. 피시술자가 원하면 신호를 보내 해당 뉴로스태트를 불활성화해서 칼리그노시아 상태를 없앨 수도 있다.


그럴 듯하다!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가장 명확한 속성이 ‘그럴듯함’이다. 읽다 보면 뉴로스태트가 근 20년 내 상용화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칼리그노시아가 개인 및 사회의 요구에 부응해서 되돌릴 수 있는 가역적인 상태인 것도 방법상으로 구현했다.


외모지상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전 세계 사람에게 성형수술을 시킨다면?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전체주의 사회로 설정하는 게 적절해 보인다. 소설에서처럼 많은 사람의 찬반양론이 오갈 수도 없고, 칼리그노시아처럼 본인이 원하면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과학적 방법의 구현으로 이야기가 더 풍부해진다.


작가 테드 창은 학부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컴퓨터 관련 매뉴얼을 쓰는 테크니컬 라이터로 종사했다. 매뉴얼이란 읽고 바로 재현 가능해야 하는 법이다. 기술문서를 쓰던 사람답게 과학적 설정은 물론이고 구현하는 과정까지 촘촘하기 짝이 없다. 소설을 보니 업계 종사자인 나보다 더 많이 자료조사하고 공부했을 것 같다. (음, 본업이 아니니까 더 재미있었을 거라고 자기위안해 본다)


작가 테드 창.  극한직업에 등장하는 테드 창이 아니다.


SF를 읽다보면 아이디어는 기발한데 과학적 치밀함이 부족하거나(시놉시스를 읽은 기분), 과학적 설정은 기막힌데 이야기를 하다 말거나(설정집을 읽은 기분), 이야기는 재미있는데 문장이나 묘사가 유치한(습작을 읽은 기분) 경우가 있다. 테드 창은 이들 요소에서 모자람이 없는데, 이에 더해 글의 구성에서 형식적 실험(다큐멘터리 구성)까지 추가했다. 혹시 작가를 위한 뉴로스태트가 있는 게 아닐까.   




참고문헌 

Soares S, et al. Front Chem. 2018 Aug 20;6:360. 

Voelker R. JAMA. 2018 Jun 5;319(21):2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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