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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안 Mar 06. 2022

지나고 보면 불안은 항상 허무했다

첫 대장내시경의 기억

인생을 살면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겁이 많다는 것이다. 어릴 때 조그만 알약을 넘기지 못해서 매번 가루로 빻아 삼키곤 했는데, 중학생이 되어서야 삼킬 수 있었다. 솔직히 지금도 비행기 타는 것이 부담스러워 바람 많이 부는 제주도가 나에게 가장 가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도에 마주하게 되면 항상 최악의 가정이 나를 사로잡는다. 알약을 삼키다 목구멍에 걸려 숨을 못 쉬거나 비행기가 떨어지는 장면 등, 확률적으로 굉장히 희박한 상황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더욱이 부정적인 장면일수록 더 구체적이고 선명하다. 


불안이 작동하는 방식은 늘 비슷하다. 처음에는 사소했던 불안이 점점 덩치를 불려나간다. 그것과 연관된 상황에 가지를 치면서 본래 상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광범위한 두려움이 된다. 적절한 시점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지만 쉽게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것이 일상을 힘들게 할 정도로 심해지면 불안장애가 되는 것인데,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불안장애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왔다.




대장내시경은 나에게 몇 년을 미뤄온 미션이었다. 장이 불편해서 한번 해야지해야지 한 것이 벌써 몇 년이 흘러버렸다. 작년에는 건강검진 무료검사 항목에 대장내시경이 처음으로 포함되는 나이가 되었다. 내 딴에는 용기를 내서 검사에 포함시켰으나, 일이 바쁜 관계로 미룰 수밖에 없었고 내심 이런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한 걸 기쁘게 생각했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검사일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살짝 미룰까 고민도 했지만 더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렇게 검사 전날, 공포의 장 세정제 1포를 뜯게 되었다. 


흰색 가루 두 봉지를 섞어서 만들게 되어 있는데, 그중 한 봉지는 비타민C 가루라고 했다. 아마도 역한 냄새를 비타민의 신맛으로 중화하려는 용도인 거 같은데,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같이 들어있던 500ml 물통에 모두 털어 넣고 물을 섞으니 뽀얀 용액이 되었다. 


마시려고 하는 순간, 몇 년 전에 엄마가 대장내시경 하던 때가 생각났다. 엄마도 처음 하는 검사였고, 나도 검사받는 사람을 처음 보는 거였다. 엄마는 뽀얀 물을 꿀꺽꿀꺽 삼키더니 갑자기 싱크대로 달려갔다. 꾸웩하는 소리와 함께 허연 국물을 게워냈다. 나는 놀라서 그 모습을 빤히 봤었다. 엄마는 입 주위에 묻은 것을 닦아내며 힘든 표정으로 "왜 이렇게 역하냐"며 중얼거렸다. 나도 이걸 마시면 바로 게워내나 싶어 망설여졌다. 입까지 갔다가 역한 냄새에 다시 놓고를 반복했다. 머릿속에는 싱크대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과 밤새 핼쑥한 얼굴로 화장실을 드나들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렇게 10분 정도 망설이다가 결국 싱크대 앞에서 첫 모금을 마셨다. 


느끼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었다. 위장에 다다르니 살짝 역한 감이 있었는데 게워낼 정도는 아니었다. 어라? 괜찮네 싶어 정량을 마셨다. 트림과 함께 기분 나쁜 냄새가 올라왔으나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첫날 마셔야 하는 것을 다 마셨고 1시간 후부터 폭풍설사를 하며 비워냈다.


밤새 탈수가 살짝 와서 잠을 잘 못 잤고 열도 살짝 났지만 큰 탈은 없었다. 아침에 병원에 가서 검사 침대에 누웠다. 말로만 듣던 새우자세를 능숙하게 취했고, 수면유도제가 들어가고서 몇 초 뒤부터 기억이 없어졌다. 눈을 떴을 때는 침대가 붙어있는 벽만 눈에 들어왔다. 속에 가스가 찬 것이 느껴졌지만,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빨리 일어나서 집에 가고 싶었으나, 간호사가 와서 수면유도제를 많이 썼으니 좀 더 누워있으라고 했다. 왜 많이 썼냐고 물으니 내가 많이 움직여서 더 넣었다고 한다. 비몽사몽에도 어지간히 불안하고 겁이 났었나 보다. 




살면서 수도 없이 불안에 시달렸지만 지나고 보면 불안은 항상 허무했다. 실패하면 내 인생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안겨줄 것 같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사실 별것 아닌 것들이었다. 회사 면접 전날 잠을 한숨도 못 자고 가는 경우가 허다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가벼운 마음으로 가도 될 것이었다. 그 회사에 결국 들어가지 못 했지만 지금 내 인생은 별 탈 없이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중학생이던 어느날, 카레에 있는 깍둑 썬 감자를 실수로 꿀떡 삼킨 이후 별 게 아님을 알고서 그 뒤로 알약을 잘도 삼켰던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시도하기 직전까지 엄청나게 커 보이던 두려움은 사실 내가 스스로 만든 거짓 아우라 덕분이었다. 거품이 빠진 다음 들여다본 두려움의 실체는 예외 없이 왜소하고 허무했다. 


다행히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대장이 아주 깨끗해서 5년 뒤에 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숙제 하나 마친 기분이다. 대장내시경의 실체를 가감없이 알게 되었으니 다음 번에는 훨씬 여유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뭔가 리스트에서 하나 지운 느낌이다.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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