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매번 말하고 싶다
데일리 플래너에 매일 ‘독서’라고 적어놓는다. 수면 부족에 컨디션 난조여도. 스트레스 때문에 펑펑 울고 난 뒤에도. 하루 종일 바빠서 숨 돌리기 급급한데도. 책 읽는 게 문제가 아닌 순간에도 ‘독서’라고 적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대체 뭐 때문에.
재미라고 하기에는 책보다 재밌는 건 많다. 책이 주는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도 많다. 심지어는 사랑이나 도덕적인 교훈에서도 책은 압도적이지 않다. 화해와 통합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반대 아닌가 싶다. 날을 세우고 비판하는 데 있어 책을 따라올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매일 독서를 계획하는 이유는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매번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회의 흐름에 동의하지 않아. 거의 늘.
책과, 책이 담아내는 글이 가진 반골 기질은 겉으로 드러나는 새로움과 늘 연결되진 않는다. 물론 글에서 진부함을 제거하는 건 늘 중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일은 아니다. <아이디어>에서도 썼지만 《마담 보바리》나 《안나 카레니나》같은 작품에서 소재는 진부함을 피해 갈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삶의 풍파를 겪는 여자들이 문학이든 현실이든 드물지는 않으니. 두 작품에서 작가들이 보여준 인식 방법의 차이를 ‘새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마저도 고통받는 ‘나사로’를 조명하고 부활시킨 이전의 문학, 당대 문학의 영향 속에서 발휘된 것이다.
그 새로움의 뿌리는 반골 기질이라 표현하는 게 더 알맞다. 고통받는 여성 인물에 대한 색다른 관점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거나 흥미를 유발하겠다는 생각보다, 그 인물들이 사회의 멸시와는 다르게 인간 전체의 운명을 상징한다는 신념이 그 작품들을 더 멀리 데려갔다. 여기서 반골 기질의 기준은 분명하다. 인간 존재를 계급이든 성별이든 기타의 이유로 대상화하거나 쉽게 비웃음거리로 만들지 않겠다는 것. 그러니 특정한 사람들을 비웃고 대상화하는 사회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 이 의지 안에서 모든 새로운 표현 방법들, 예를 들면 ‘낯설게 하기’, 보여주기, 참신한 비유나 상징 등이 동원된다.
문학 바깥의 책도 마찬가지다. 특히 ‘모던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20세기의 명저들에서, 이성은 ‘이성의 지배’로 희생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도전을 받고, 사랑은 사랑에 의해 배제된 사람들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당대의 지성들은 자신들의 천재성을 전쟁으로 인한 눈물과 절규로 심문할 줄 알았다. 자신들의 지적 능력과 이성을 수백 페이지 넘게 구조적으로 회의하고 비판할 줄 알았다. 그런 철저한 반대의 영역이 있기에, 불쏘시개 같은 책들이 나뒹굴지라도 나는 책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