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롯이 만드는 것
솔닛은 에세이도 단편소설 분량으로 쓰네.
레베카 솔닛의 수필을 읽을 때마다 우선 그 규모에 감탄하고는 한다. 그녀의 글을 다 본 건 아니지만, 내가 읽었던 솔닛의 수필들은 아무리 못해도 30쪽 이상이었다. 대개 한국어 번역본의 분량이 원본보다 많은 걸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원본의 내용이 양적으로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길 잃기 안내서》라는 수필집 맨 앞에 실린 <열린 문>이라는 작품은 어린 시절 겪은 유월절 풍습으로 시작한다. 상당수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엘리야 선지자 몫의 포도주 한 잔을 식탁에 올려놓는 것과, 언제든 선지자가 올 수 있도록 집의 문을 열어두는 전통을 지킨다. (솔닛은 유대인 집안 출신이다.)
이 도입부에서 보이는 ‘열린 문’의 이미지는 미지의 대상이 들어오는 문이자, “언젠가 내가 나갈 문”으로 표현되며, 열린 문을 나와서 ‘길을 잃어버리는’ 개인의 여정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우리가 그 속성을 전혀 모르는 무언가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메논의 질문을 마음에 품은 채, 계속해서 길을 가고 길을 잃어버리는 솔닛.
그녀는 모르는 무언가를 예언해야 하는 예술가의 입장, 특히 “그러나 숲에서 길을 잃을 때처럼 도시에서 길을 잃는 것에는 상당히 다른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문학인 발터 벤야민의 발언을 거친다. 영어로 ‘길을 잃다’를 의미하는 ‘lost’가 군대를 해산한다는 뜻의 고대 노르드어 ‘los’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지난다. (“이 어원에서는 병사들이 대형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더 넓은 세상과 휴전을 맺는 모습이 상상된다.”) 로키산맥에서 산악 수색팀으로 일하는 샐리가 길 잃은 사람들을 구조한 경험, 현대인들과 달리 길을 잃고도 유유자적했던 19세기의 미국인과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이야기도 통과한다. 그리고 다시 메논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작중에서 그녀는 길을 잃고 방황한다는 것은 삶이 운영되는 방식이므로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떻게 길을 잃을 것인가”가 문제임을 알게 된다. 모르는 곳에서도 아는 체, 태연한 체하며 발을 떼야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도. 그래서 그녀는 메논의 질문에 약간의 모순이 있음을 알아챈다. 소크라테스가 《대화》에서 지적했듯이 우리 인간에게 “그 속성을 전혀 모르는 무언가”라는 건 사실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불멸하는 영혼의 환생을 믿었던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무엇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알았던 것을 잊어버렸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잊어버리고 삶과 세계를 헤맬 뿐이라는 것이다. 솔닛은 소크라테스의 해석에 끌리지만 그의 주장이 “모르는 것의 위치를 내가 모르는 타자에게서 내가 모르는 나에게로 옮긴 데 지나지 않는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메논의 미스터리와 소크라테스의 미스터리에서 어느 한쪽도 편들지 않지만, 그 자체로 길 잃기에 대해서 탐구한 자신의 작품을 예고하며 글을 마친다.
솔닛의 글은 수필에도 정교한 플롯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녀의 수필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규모도 규모지만,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메시지의 깊이와 다양성은 그 플롯에서 비롯됐다. 자신의 생각만을 날 것으로 던져놓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관습, 자신의 경험, 역사적인 사료와 어원의 역사 등을 짜임새 있게 배치하여 자신의 주장뿐만 아니라 문제의식, 세계상, 질문도 함께 드러낸다. 이렇게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더라도 추친력을 갖췄기에 평이하진 않아도 흥미롭다.
반대로 거의 ‘양산형’에 가까운 수필들을 떠올려 보면 구성이랄 게 거의 없어 보인다. 끝없이 습작되는 상당수 소설도 마찬가지다. 서사와 플롯에 대한 담론은 넘쳐나는데도, 그 담론은 일부의 고급 문학에만 적용된다. 아니면 자극적인 사건으로 관심을 끌지 않았다는 흠집 내기식 비평에 악용되거나. 유일하게 지켜지는 것이 있다면 도입부, 특히 첫 문장이 주의를 끌어야 한다는 것일 텐데, 시작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본론의 내용이 부실하거나, 진부한 전개, 훈계조의 결론을 보이는 경우가 대다수다. 시작만 그럴듯할 뿐 본문의 내적 논리는 빈약하거나, 모순점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화제를 던져놓고 그에 대해 품평을 하는 정도로, 대개 시간이 지나고 유행이 바뀌면 시사점이 증발하고 만다.
사실 내 글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여전히 플롯을 많이 지적받는다. 특히 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자신만의 생각이나 논리를 내세우는 개성은 있지만, 그 생각과 논리를 만든 사건, 사건이 펼쳐지며 발생하는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소설이 정적이고 단선적인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 평가를 곱씹으면서, 내가 사람이 ‘반응하는’ 존재라는 걸 잊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사람이 어떤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떻게 상처 입는지에 대해 나는 종종 잊곤 한다. 사실 그 배움과 상처의 기억들이 글을 쓰게 만드는데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쓰게 하는 힘에 대해서도 곧잘 잊어버린다. 나의 문제의식과 정념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지 못한다. 미완성이 티가 나는 작업물 앞에서 책임지지 못한 나를 본다. 권한을 쥔 사람들이 책임을 저 버리는 무책임한 시절이지만, 창작마저 그럴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