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생활 - 문장

짧은 문장은 맞고 긴 문장은 틀리다는 말

by 김남희

가끔 작법서를 볼 때가 있다. 첫 문장은 섹시하게 쓰라느니, 필이 꽂히게 쓰라느니 주책맞은 말투로 사람을 훈계하지만, 그 자체로 유해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끝없이 발전하는 문학에 발맞추지는 못하더라도, 기본적인 요소들, 알고 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요소들을 발견하는 데 이들 책은 분명 도움을 준다. 그렇다 하더라도 별로 동의하지 않는 내용도 있다. 상당수 책이 주장하듯이, 문장은 짧게 쓰라는 말. 설명문과 같은 글이면 또 모를까, 논설문이나 학술적인 글에서조차 복문이 나오기도 하거늘. 하물며 문학적인 글에서도 문장을 짧게만 쓰라니.


물론 기본적인 언어의 이해 없이 긴 문장을 쓰면 가독성이 떨어진다. 문장 호응이 어긋나서 비문이 되기도 쉽다. 거추장스러운 수식어가 늘어진 문장은 진부하고 촌스럽다. 하지만 짧은 문장만 쓴다 해서 문제가 없진 않다. 자신의 언어로 만들지 못한 짧은 단문은 개성이 부족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지 못한다. 달걀을 그릇에 깨뜨려 숟가락으로 휘저으면 달걀물이 된다. 이런 걸 알려주는 건 의미가 있지만, 그게 문장의 전부는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정보와는 다른 것, 깨진 달걀 껍데기를 보며 드는 소회라든가, 달걀물로 요리를 하며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의 기억 같은 것들이 일상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때의 문장은 마냥 짧을 수 없으며 쉽게 알아들을 만한 것만 전달하지 않는다. 일차적인 비유를 가져다 이야기하고 바로 이유를 설명해 줄 수도 없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많은 문장들은 신비로 남는다. 김수영이 탄식하며 “그림자가 없다.” 고 할 때, 카프카가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할 때처럼. 그림자가 왜 없는지, 그레고르 잠자가 왜 해충으로 변했는지는 명료하게 설명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앞서 말했듯 그림자와 벌레는 주어진 삶의 신비이며, 그 신비 속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갈래로 얽혀있는 의미들을 조금씩 캐낼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짧게 쓰든, 길게 쓰든, 직유법을 사용하든, 상징을 사용하든, 뭐든 간에. 비하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옛날 사람들이 소설과 같은 산문 장르를 ‘잡문’이라 표현한 것에는, 글에 그만큼 다채로운 문장과 풍부한 표현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수 있다. 글뿐만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다종다양한 방식이 필요하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설명만 타인에게서 찾으려는 행동은 타인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심오함과 존엄성을 부정하는 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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