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하지 않고 적도 없는
초등학교 때부터니까 인생의 절반도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동안 나는 작가가 되고 나서 어떻게 할 것인지 ‘포부’가 대단했다. 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몰랐던 것을 알게 하고 싶었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지금에 와서 뭘 하고 싶냐고 물으면 어물거린다. 그냥 쓰면서 내가 재미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떨 때는 한 글자도 안 적고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읽는 게 더 재밌는데도.
대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여러 계기가 있겠지만 그날이 떠오른다. 작가가 되려면 모두를 사랑해야 하잖아. 누군가가 편협한 나를 두고 화가 나서 한 말이었다. 대단히 선량한 발언이었는데도 너무 모욕적이었고, 지금도 그 말을 곱씹으면 지옥 같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우선 테드 창이 자기 소설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옥은 신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려면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종교에서의 보편적인 사랑과 느낌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종교에서는 신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보편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보잘것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 누명을 쓰고 희생당한 신.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피 흘린 신. 그 신이 인간 존재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었기에, 인간도 신을 닮아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앞선 말에는 빠져 있다. 지장보살의 중생을 향한 사랑과 희생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다. 세속적이고 무종교적인 버전에서 작가는 무엇 때문에 모두를 사랑해야 하는 걸까? (허구든 진실이든) 어떤 선구자들의 희생과 사랑이 전제되지 않았을 때도 인간은 다른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의무를 가지는 걸까? 나에겐 그게 지옥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희생자 신을 사용하는 종교에서조차 ‘만인’이니 ‘인류’니, ‘모두’ 같은 말을 사용해서 사랑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어리석지만 지도의 여지가 있는 ‘중생’이나 당장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다른 호칭, 예를 들면 유대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민, 남자와 여자 등이 있지만 이들을 다 뭉뚱그려서 ‘만인’, ‘모두’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사랑하라든가 용서하라든가 하는 말을 전할 때는.) 종교의 이 같은 신중함은 설령 신의 사랑으로 인해 타인을 사랑해야 하는 인간들조차 ‘모두를 사랑하라’는 말이 경악스러울 수 있다는 걸 알아서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다시 돌아오면, 나는 모두를 사랑하기는커녕 내가 소속된 집단조차 별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으며, 아무 데도 적이 없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글을 쓴다. 한국에 사는 30대 초반의 여성인 나. 노동자 집안 출신의 나. 여기서 그나마 마음이 가는 건 ‘노동자 집안’ 정도다.
나는 한국 사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매우 물질 중심적이고 약자를 차별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내 또래의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을 연다거나 연대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오히려 약간 경계하는 편이다. 능력주의나 경쟁에 매몰된 나머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꽤 있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서울광장 앞에 희생자 분향소를 설치했을 때, 가장 높은 비율로 반대라 응답한 집단이 30대와 20대라는 여론조사가 뉴스로 나오고 나서는 더 경계했으면 했지, 덜 하지는 않는다.
‘여성’이라는 집단에 대한 내 감정은 꽤 양가적인 편이다. 주어진 환경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그 환경의 불합리와 비윤리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지적하는 소수자로서의 여성, 비판적 인간으로서의 ‘여성’이라는 건 멋지다. 어쩌면 ‘여성성’이라는 건 친절함, 부드러움, 모성이 아니라 사회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감각, 그로 인한 비판과 저항이 아닐까 싶을 만큼.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에 들어맞지 않는, 그 세상에 완전히 수렴되지 않는 면이 있다는 점에서, ‘여성이 인간’이라고 주장할 게 아니라 ‘인간이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렇지만 ‘여성’이라는 집단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을 다 사랑하지는 못한다. 가난한 이들을 차별하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 이민자, 난민을 혐오하는 사람들, 퀴어를 조롱하는 사람들, 장애인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어린이, 청소년, 중·장년들을 무시하는 사람들, 기혼자와 어머니가 된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 (폭력과 학대가 없었다는 전제하에) 자신의 어머니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들은 너무 싫다. 인종, 계급, 연령, 장애, 출신 지역 등이 결부되지 않은 ‘순전한’ 여성 문제가 있을 거라고 믿는 멍청이들을 놓고 자매애를 느끼고 싶지 않다. 멍청한 인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위를 맞춰줘 봤자 멍청함은 커질 뿐이고, 다른 여성들만 그 멍청이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앞에서 좀 가혹하게 내가 있는 집단들을 비난한 것 같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물론 내가 속하지 않는 집단도 문제 이긴 마찬가지다. 물질 중심적이고 차별적인 사회는 세상에 한국 사회 말고도 많다. 청년들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니, 이 사회가 지금 위기인 것이다. 남성 집단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론, 출판, 시민사회를 비롯한 많은 분야가 대단히 걱정한다. 세상에 문제없는 집단은 없다. 내가 있는 집단이 내가 포함되지 않는 집단에 비해서 대단히 더 심각한 문제를 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알고 있다. 그렇다 해도 내가 덜 심각한 곳, 덜 더러운 곳에 있다는 이유로 대단히 감사하며 고개라도 숙여야 하는 건가. 나의 집단에 대한 벅차오르는 사랑으로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는 건가. 남의 큰 불행을 보면 내 불행이 없어지기라도 하나. 정말 뭐라는 건지. 이제 나는 과거의 그 사람이 정말 진지하게 말했는지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사랑, 특히 타인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어렵고 고된 일인지를 알 테니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도 어렵다고 했으며, 아렌트는 자신이 속한 어떤 집단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만 사랑했다. 대단한 문필가들도 그리 말할 정도인데, 아직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는 사랑이니 인류애니 하는 말이 얼마나 비현실적 일지 이해 해주길. 모두에 대한 사랑과 모두를 위한 글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