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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리 Oct 05. 2022

어설픈 ENFP의 슬픔

과감하게 넘나들거나, 진득하게 하나에만 집중하거나



나는 타인의 꾸준함과 성실함, 또는 과감함을 동경하는 ENFP다.


여기저기서 ENFP를 세상 핵인싸에, 뭐 하나 진드거니 하지 못하며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사는 세상 천방지축 망나니로 묘사한다. 저 중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충 저렇게 말하면 다들 아, ENFP구나 한다.


그런데 세상에 사람 수만큼의 성격이 있는데 어떻게 무 자르듯 ENFP는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E와 I를 49대 51로 오가는 나같은 사람은 세상 핵인싸도 아닐 뿐더러 P와 J 또한 먹고 살기 위해 40대 60 정도로 오가다 보니 정리하며 계획하는 J의 삶이 더 잘 맞아지기도 했다. 아무튼 MBTI는 이렇게나 오묘하다.

오늘 아침엔 바나나우유를 갈아 마시면서 뉴스레터를 보다가 직업을 6번 바꾼 ENFP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봤다. 하고 싶은게 너무 많아서 다 하다보니 직업을 여러 개 오갔다고. 같은 ENFP인데 나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 하고 싶은거 다 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회사에서 월급주는 직업은 여태껏 하나다.


회사를 다닐때는 그저 자유로운 한량이 내 꿈인줄 알았다. 퇴사를 하고 사업을 벌려보니 내가 원했던 자유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자유라는걸 알았다. 내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착각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세상에 풀어놓을 수 있었을때 비로소 깨닫고 없어졌다. 오히려 퇴사를 하고 나서야 프리워커라는 목표를 갖게 됐다. 떼돈을 벌어 영영 일을 안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먹고 살 수 있는 자유쯤, 쉽게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응 안쉬워. 쉽게 가질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쉽게 손에 쥐게 된다고 해서 그게 완전히 내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살면서 쉽게 갖게 되는 건 의심부터 하고 보게 됐다. 자신이 무수하게 고민했던 시간과 시행착오의 시간들을, 당신만은 겪지 않아도 되도록 모든 지식을 다 때려넣어 만들었다며 각종 투잡이며 사업에 대한 강의를 파는 사람들도 많아졌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성공한 이유는 쉽게 전할 수 있는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지식을 얻기까지 스스로 고민하고 시도하며 쌓인 노하우와 경험 그리고 인사이트다. 그런 강의에 몰리는 수많은 직장인들의 꿈이 프리워커일지도 몰라.


경제적 자유를 누리게 된다면 회사 때려치고 세계여행 간다는 사람도 많지만, 원하는 사업에 도전하거나 현실적인 이유로 고이 접어둔 꿈을 다시 펼치겠다는 사람이 더 많다. 꿈을 쫓으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를 어릴때부터 주구장창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여행도 콘텐츠가 되고 돈이 되는 일이 될 수 있는 세상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하면서 먹고 살기까지 할 수 있는 '일'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다듬어야 그게 다른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가치있는 콘텐츠가 될까. 아무튼, 쉬운 건 없다니까.


더욱이 문제는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겠을 때다. 고이 접어둔 꿈같은 것도 없을 때. 나같은 경우는 그런게 없었다. 어릴 때 피아노며 미술이며 이것저것 학원도 다녀봤는데 그나마 소질도 있고 재미도 있던게 글쓰기 학원이었다. 아동문학작가 선생님 글방으로 가서 시도 쓰고 산문도 썼다. 그렇게 쓴 것들로 대회도 나가고 상도 타고 하니 더 재미가 붙었다. 하지만 그게 오래가지 않았다. 당장 중학교때부터는 갑자기 왠 중간고사 같은걸 보더니 75점 정도 나온 수학 성적을 끌어올리는게 내가 지금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하는 일 같은게 됐다. 글쓰기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멀어지고 있는지도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도 사실 신경쓰지도 않은 채. 그때부터는 뭔가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재밌는 일도 없었달까. 고등학교 시절 진로 결정할때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그냥 왠지 모르게 국문과나 심리학과를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작게나마 드는 걸 무시하고 취업 잘된다는 경영학과를 썼다.


그렇게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당시로선 어떻게든 해내야 인생이 펼 것만 같았던, 지금으로서는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성공이란걸 해보기 위한 선택에 선택을 반복한 결과 직장인과 프리랜서 사이 8년 차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헤매며 직업을 6개나 도전했다는 ENFP의 이야기에 가슴 설레는 어설픈 ENFP가 됐다. 명확하게 뭘 좋아하는지 몰라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와 진짜 못해먹겠다 싶으면 과감하게 퇴사도 해보면서, 그렇다고 손에 조금이나마 쥔 걸 영영 뿌리치지는 못하는, 용기있는 ENFP나 차라리 엄청 꾸준하게 묵묵히 좋아하는 일을 하는 J나 S같은 사람들을 동경하는 아주아주 어설픈 ENFP.


어쩌면 내가 ENFP라서 꾸준하지 못한게 아니라, 이지혜 말마따나 삶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의미있고 재미있게 살아보고픈 마음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다보니 ENFP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어설픈 ENFP인 나도 뭐 하나 진득하게 오래오래 하고 싶다. 다능인을 꿈꿨던 때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동경하는 건 아예 좋아하는게 너무 많아 그것들을 과감하게 오가는거 아니면, 좋아하고 잘하는 것 하나를 오래오래 하는 거, 둘 중 하나다. 아마도 지금은 다시 아주 미세하게나마 끌리는 것들에 귀기울여서 집중하고 싶은 어떤 일을 찾은것도 같다. 여전히 좋아하는게 많은 삶에 가슴 설레긴 하지만, 내가 지금 내 마음의 소리에 집중한 결과 몇 년 후에도 내 MBTI가 ENFP일지는 잘 모르겠다. 어설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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