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파헤칠 필요 없다고 믿었던 나에게 건네는 사과
언어는 때때로 폭력적이다. 형태가 없는 어설픈 느낌을 문장화하거나 단어로 정의해 버리면 별 것 아닌 것 같았던 것이, 새롭고 강하게 다가온다. 자꾸만 떠오르는 불쾌한 경험에,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외상)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 그랬다. 트라우마라는 단어로,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면, 지탱하고 있는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았으니까. 나는 아무 문제없다, 괜찮아, 이렇게 되뇌곤 했다.
보통의 날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우울이 찾아오면 빠른 비트의 팝송을 찾아 듣는 평범한 것부터, 문득 죽음이 두려운 날에는 사후세계를 유머로 풀어낸 <비틀쥬스> 같은 영화를 본다거나, 능력 좋은 요원들이 살인범을 찾아내고야 마는 <CSI> 같은 범죄 수사물을 찾았다. 하지만 이런 반창고로는 결코 총상을 치료하지 못한다. 근본, 근원을 찾아내야만 하는 때가 반드시 온다.
지금 내가 풀고자 하는 실타래는 어린 시절의 작은 기억이다. 나에게는 어린 시절 엄격했던 모습 때문에, 유난히 대하기 불편한 친척이 있었다. 코로나로 집합 제한이 있었던 몇 년 전, 굳이 그 친척을 만나러 간다던 어머니에게 서운함을 느껴 대판 싸워버렸다. 결론 없는 다툼 끝에 자리를 뜬 어머니, 그리고 나는 혼자 남아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보았다. 별 것 아닌 일로 필요 이상의 화를 냈다는 후회가, 처음으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했다.
그건 폭력의 기억이었다. 버릇이 없다며 오갔던 손찌검과 그 순간에 곁에 없었던 부모님. 그저 어린 시절 크게 혼났던 기억일 뿐이라고 치부했었는데, 오늘날까지 감정의 구멍이 남아 있었다. 왜 내가 그 사람을 탐탁지 않아 하는지, 왜 어린 시절의 훈계가 지금까지 떠오르는지. 끊임없는 질문으로 어렸던 그날을 곱씹으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너무 무서웠다고,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외로웠고, 아직도 그 사람이 두렵다고, 그리고 어린 나를 지켜주지 못한 당신들이 밉다고. 살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울었던 건 처음이었다. 앉은자리에서 휴지 한통을 다 쓸 정도로 펑펑 울었다. 눈은 빨갛게 부어 올라서는, 거울 속의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는데. 우습게도 속 시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종교는 없지만, 문득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마주한 이후, 더 이상 그 사람과 그날의 기억이 두렵지 않았다. 그저 별 것 아닌 일로 어린아이에게 손찌검을 한, 부족하고 초라한 어른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면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선택을 하게 되었고, 만나야만 할 때에는 이전보다 수월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딘가 찝찝한 가족 모임은 이제 영원히 안녕이다.
무엇이 나에게 어떻게 왜 나쁜지 알게 되었기에, 나를 제대로 보살필 수 있게 된 것이다. 트라우마라고, 문제라고, 이름 붙이고 그것을 끝까지 파헤치는 것의 끝에는 나를 지키는 방법이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렵사리 그날의 기억과 감정을 고백했을 때, 사과와 이해를 받을 수 있었다는 후일담도 전하고 싶다. 우리는 생각보다 이해받을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설령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감정과 마음의 흐름이 옳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면 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틀릴 수가 없는 것이니까.
– 트라우마 속에서 당신을 지키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며, M으로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