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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왕자 Nov 28. 2023

그거 알아? 너, 진짜 바보 같다

평소보다 일찍 집에 왔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30분이다. 일학년 아들은 하교 전이다.


아들이 얼른 보고 싶다.


교문 앞에서 아빠를 보면 아들이 깜짝 놀라겠지.

아빠~ 큰 소리로 부르며 달려오겠지. 껴안아 주겠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아들아 기다려라. 아빠가 지금 간다.




우리 집 대문을 열면 비밀스러운 우체통이 오른쪽에 있다.


비밀스러운 우체통 ⓒ어른왕자


소행성 B123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글자와 숫자에 담긴 비밀을.


우리 동네 분들은 이 우체통을 보고 내 이름이 소행성인줄 알았다고 한다.

이웃집 아주머니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던지.

동네 사람들! 우리 부모님, 자식 이름 가지고 장난치는 그런 분 아닙니다.


아들! 딸!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사실 아빠는 어린왕자란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서 어른왕자가 되었지.

아빠가 어릴 적에 살았던 별이 있었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별. 

너무 오래되어 되돌아가는 길을 모르겠어.

그 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했단다.

아직도 아빠는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고 있어.


그래서 그곳만큼 아름다운 아주 작은 별을 이곳에도 만들고 싶었단다.

그 별 이름이 소행성 B123, 

바로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란다. 어때, 멋지지 않니?


별처럼 빛나는 작은 집. 세상 어딘가를 조용히 비추는 집.

누군가 이곳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집.

힘들고 외로울 때 잠깐 마음을 맡겨두는 집.


왜 123이냐고? 그것까지 알려줄 순 없지. 너희들이 맞춰 보렴.




아이들 흉내를 내며 걸어본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낙엽을 발로 툭툭 건드린다. 신발을 질질 끌면서 둘레둘레 살펴본다.

교회 십자가가 보인다. 커다란 성경 말씀 간판도 보인다.


성경 말씀 간판 ⓒ어른왕자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주, 예수, 구원,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만나게 되고 고민하게 되고 갈등하게 될 희미한 말들.

구원이라는 두 글자에 자꾸만 눈이 간다.

나는 구원받았는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파란 성경 말씀 간판 너머로 빨간색 제주흑돼지 식당 간판이 보인다.

간판에 흑돼지 그림까지 넣었다. 진짜 흑돼지다.

3+1 이벤트 행사를 하고 있다.


제주흑돼지를 먹거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1인분을 더 받으리라

(오후 14:31)


예수님, 죄송합니다. 배가 고파서 저도 모르게, 허상이 보입니다.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사거리 모퉁이에 현수막이 나부낀다.

강렬한 태양이 위에서 지켜보고 있다.

과태료 vs 양심 현수막 ⓒ어른왕자


100만원 이하 과태료 부과. 100만원 이라고?

궁금하다. 불법투기가 적발되어 1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낸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내 머릿속에서 부등식 하나를 꺼낸다.

100만원 과태료 < 양심을 버리는 일

양심을 버리는 일이 더 큰 일이다. 과태료 세 글자보다 양심 두 글자가 더 무겁다. 

무섭다.


양심이라는 것은 몇 개일까?


만약 한 개라고 하면, 

좋은 마음을 다 버렸으니 이제 좋은 마음은 없다. 나쁜 마음밖에 남아있지 않다.

한 마디로 완전 나쁜 놈이 되는 거다.


쓰레기 불법투기

완전 나쁜 놈이 되는 일입니다. 


양심이 한 개가 아니고 여러 개라면?

그럼 한 개는 버리고 몇 개는 아직 남아있으니 이전보다 덜 좋은 마음이 되는 거다.

바꿔 말하면 이전보다 좀 더 나쁜 놈이 되는 거다.


쓰레기 불법투기

좀 더 나쁜 놈이 되는 일입니다. 


어찌되었든 완전 나쁜 놈이 되거나 좀 더 나쁜 놈이 되는 것이다.

나쁜 놈이 되는 건 이래도 저래도 피하기 힘들다.


양심을 버리는 일, 우리 모두 하지 맙시다.




예전에는 양심이 여러 개인 줄 알았다.

나무에 달린 나뭇잎처럼 몇 개를 떨어뜨려도

아무렇지 않아! 

이 정도쯤이야, 뭐 어때!

그래도 나에게는 양심이 남아있어!

아직 남은 나뭇잎이 많고

새로운 나뭇잎이 돋아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양심은 단 하나.

나뭇잎이 아니라 나무다.

양심을 버리는 일은 나무가 쓰러지는 일이다.

나무에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을 위협하는 일이고

나무에 기대거나 나무를 스치거나 나무를 알고 지내는 모든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주는 일이다. 

미안한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이 양심을 버리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나는 이 양심을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




양심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많았다.


내 머릿속에서 부끄러운 등식을 꺼낸다.

양심을 지키는 것= 바보 같은 짓=미련한 짓=손해 보는 짓

이런 수학적 사고 속에서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했던 시절이 있었다.

양심을 지키는 일, 시간과 돈을 위해서는 결코 유익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뭇잎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다행이다. 지금은 그런 생각에서 조금 벗어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언제 또 양심을 버릴지 모른다. 

양심을 나뭇잎이라 말하며 스스로 위안할지도 모른다.


기회주의적인 나랑 마주칠 때, 반드시 싸워 이겨낼 수 있도록

하루하루 순간순간마다 뿌리에 힘을 잔뜩 준다. 

차렷! 

정신 차렷!


가끔  나는 나를 놀린다.

미소를 지으며 약을 잔뜩 올린다.

'양심이 밥 먹여 주냐?'

'그거 알아? 너, 진짜 바보 같다.'




멋진 바보.




아빠!

아들~

눈이 마주친 우리,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꼭 껴안고 지구를 한 바퀴를 돈다.

멋진 바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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