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산시 영도구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다. 2살 터울의 동생이 태어난 곳도 부산시 영도구 산부인과 병원. 그러니 적어도 태어나 몇 년은 부산에서 살았던 것인데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지 그곳에서의 삶은 기억나는 게 없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고 ‘아, 이런 곳을 갔구나.’ ‘아 내가 이런 곳에 살았구나.’ 하지만, ‘맞아, 나 여기 기억나!’ 같은 건 없다. 말 그대로 태어나기만 한 곳이라 그곳을 ‘고향’이라 말하기 망설여지는 마음을 안고 살아왔다.
그렇다면 기억나는 첫 ‘우리’집은 어디인가. 그곳은 큰 할머니와 작은 할머니가 살았던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금덕리 금곡마을 초입의 어느 집이다. 마당 넓은 그 집에 우리 가족은 세 들어 살았다. 큰 할머니 작은 할머니라 하지만, 그 할머니들은 나의 원가족과는 상관없는 집주인이었다. 대문을 열면 마당이 펼쳐지는 그 집의 정면에는 주인집이 있고 왼편에 있는 작은 집이 부모가 세 들어 살던 우리 집이었다. 집주인인 할머니들은 작은 할머니가 어머니인 큰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명절 때는 할머니의 자녀들이 찾아와 북적이는 집이었다.
우리 집은 일 년 내내 북적이는 경우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명절이라고 해서 어딘가에 가지도 않았고, 누군가 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꽤나 오랫동안 명절은 그냥 빨간 날로 쉬는 날이었을 뿐이었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으로 명절을 보내는 사람들을 성인이 되어서는 자주 만났지만, 당시에는 우리 집만 그런 것 같았다. 그건 우리 부모란 사람들이 가진 특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는 사람들을 잘 챙기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때의 그런 삶의 모양들은 나의 부모가 가진 가난을 가늠하게 했을 요소지만 어릴 땐 그냥 좀 외로웠던 것 같다. (물론 그런 지점들은 부모가 다른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거나 환영받지 못할 상태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아쉽게도 그 집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넓은 마당에서 뛰놀았던 몇 개의 사진이 있을 뿐이고, 무화과나무가 있었다는 점, 큰 개가 있었는데 그 개에 물려서 동물에 대한 무서움이 생겼다는 점, 종종 큰 할머니와 마당을 걸으며 놀았다는 점들 외엔 정작 우리가 살았던 그 작은 집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부엌 공간이 따로 있었다는 건 기억이 나는데 한 방에 아빠 엄마 나 동생이 모두 같이 잠을 잤는지, 따로 방이 있었는지 모두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 동네에서 사귀게 된 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 집처럼 하나의 대문 안에 두 개로 나뉜 집에 살지 않았던 것은 기억한다. 내가 친구의 집으로 간 기억은 있지만 그가 우리 집으로 온 기억은 없다는 것도.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를 보며 하나의 문을 지나 방만 나뉜 집에서의 삶도 알게 됐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런 지점이 또래집단이 형성되는데 방해가 됐던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한 초등학생에게 “언니 집은 몇 평이에요?”라는 질문을 받는 지금과 같은 시대도 아니었고, 임대아파트에 사는 어린이들을 ‘엘사거지’라고 부르던 때도 아닌 오래전 시골에서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따돌림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만들어지고 채워진 기억에 따르면 그 집에 온 것은 부모가 원했던 바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형제도 등 쳐 먹은 거야’라며 큰 아버지를 무척이나 미워했고 아주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아빠가 공장을 차리고 자신의 사업을 벌인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뚜렷하게 기억나는 아빠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이었던 걸 보면 아마 그마저도 망해버린 게 아닌가 싶다. 살면서 이런 질문을 부모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들은 행복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굳이 무엇 하나를 더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는 먹고 살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해야 했기에 늘 바빴는데도 늘 가난했다.
우리는 금곡마을 셋방에서 몇 년을 살았다. 나는 그 집에서 엄마 몰래 “아이들은 먹는 거 아니야”라는 커피를 처음 마셔보았고, 바쁘고 무심한 부모와 살며 한글도 떼지 못한 채 학교에 입학 했다. 유치원을 가기 전의 나이였던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도 얼마간은 살았던 그 집은 아마 함평에서 살았던 집들 중에서 가장 오래 거주했던 집일 것이다. 부모가 함께 살았던 집들 중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을 산 집이도 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첫 고통이라 여겼던 부모의 싸움과 아빠의 자해가 일어난 장소이기도 했다. 그때의 경험이 어린 나에게 상상과 더해져 기묘한 기억이 되었다는 걸 서른이 넘어 알게 되었다. 어리고 작았던 나와 동생뿐 아니라 어쩐지 엄마와 아빠도 작은 집처럼 작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은 시절.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첫, 우리가 살던 집이다.
2020년 여름에 친구가 이른바 ‘김자매’ 생가투어라며 이름 붙인 당일치기 여행으로 아주아주 오랜만에 함평에 다녀왔다. 그때 십 대 시절을 보냈던 마을 일대를 여기저기 둘러보고 우리가 처음 살았던 금곡마을에도 갔다 왔다. 비록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기억을 떠올려보는 정도였지만, 사진으로만 추억하는 곳에 서 있으니 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다시 이곳에 와볼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묘한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문 앞에 섰을 때, 작은 할머니랑 큰 할머니는 아직 이곳에 살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소식도 아는 게 없지만, 나는 그 문 너머 마당 한쪽에 할머니, 들이 계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