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집에 사는 사람들

by 수수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는 이사를 했고 엄마와 아빠는 일하는 직종을 바꾸었다. 부모는 둘이서 같은 곳에 일하러 다녔는데 그곳은 쌀 공장이었다. 이 기억을 떠올리다 이십 대 초반에 나와 동생도 그때의 부모처럼 같은 곳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음을 떠올랐다. 이십 대 초반에 같이 살던 친구들이 한 편의점에서 같이 일했던 것도. 그런 생각들이 하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이 전문직이 아닌 일터를 공유하며 함께 일하는 것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들을 잇고 싶단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여하튼 부모는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다 한 차례 변화를 가졌다. 엄마는 자영업의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명자는 총 세 번의 가게를 차리고 망했다.(이 글에서 등장할 가게는 엄마의 첫 번째 가게와 두 번째 가게이다)

엄마가 자영업자가 된 뒤, 우리는 한 번도 거주하는 집과 장사하는 가게가 분리된 공간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영업을 하는 시간에는 엄마의 장사 공간이었다가 장사가 끝나면 혹은 장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우리의 생활공간이 되는 공간. 이렇게 글로나 구분되지 실상은 그렇지 않기 일쑤였던 공간에서 우리는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월급을 받던 명자는 어느 날 아무도 제게 월급을 주지 않고, 제 스스로 수입을 만들어야 하는 자영업자가 되었다. 그녀의 또 다른 불행과 아픔은 그게 시작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오래전 시작부터 고통이었을까. 나는 아직 답을 모르겠다.


엄마가 처음으로 열었던 가게는 정체성이 모호한 곳이었다. 과일도 팔고, 채소도 팔고 뭐 잡다한 것들을 파는 곳이었다. 편의상 야채가게인 그 곳은 1층에 위치한 미용실 옆 가게였다. 공간 구분 없이 휑하게 네모난 모양이었던 가게 안쪽에 미닫이문을 열면 나오는 곳이 바로 우리 집이자 안방이었다. 안방이라고 하기 에는 그 집의 방은 하나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굳이 안방이라고 표현하는 건 다락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락방이라고 해도 ‘빨간 머리 앤’의 방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창문 없는 그 다락방은 좁은 계단을 약간 타고 올라가면 창고인지 방인지 조금 헷갈리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락방은 다락방이고, 방은 방이었다.

과연 그 야채가게에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이 있었던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명자는 도대체 어떻게 월세를 감당해왔을까. 새삼스런 질문들이 고개를 들지만 그건 일단 차치하고 엄마의 다음 생계노동으로 넘어가보려 한다.

엄마는 야채가게를 정리하고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2층 상가로 영업장소를 바꾸었다. 지금도 동생과 “엄마 치킨이 너무 맛있었지”하고 기억하는 그곳은 통닭집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호프집이었고, 그곳도 이전의 가게와 마찬가지로 가게 안쪽에 문을 열면 생활공간=안방이 나오는 공간이었다. 호프집에서의 생활은 이전 집보다 더 가게와 집이 구분이 없는 곳이었는데 그 이유는 화장실이 가게를 지나 출입문을 열고 나가야 있었고, 부엌은 가게 주방과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냥 호프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 역시 어느 때고 쉽사리 호프집의 장사를 돕기 위한 노동력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집에서는 안방이 아닌 나와 동생이 함께 자는 자매의 방이 있었는데, 이게 또 희한한 구조였다. 그러니까 엄마 방을 지나서야 닿을 수 있는 방이었던 것이다. 대체로 집을 생각하고 부모의 방과 자녀의 방을 나누어 그려볼 때 그 가운데는 응당 거실이 있기 마련인데, 우리가 살았던 집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거실이 없는 집에 살았다. 안방이 거실이자 가족의 생활공간이 되는 집. 방 두 개인 집이었지만 우리는 방 하나에서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드라마를 보고 때론 같이 잠을 잤다. 그런 우리에게는 각자의 사생활이란 것이 존재하기 어려웠다. 자기만의 방은커녕 모든 것이 하나의 방을 통해 이뤄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나와 나의 원가족이 살아왔던 집의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나서 하우스메이트인 동생과 “어렸을 때 살던 거기 기억나?”로 시작한 대화로 알게 된, 아니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여태 ‘거실 없는 집’에 대해서만 생각했는데, 사실 우리가 살던 집엔 그보다 더 중요할 ‘욕실’이 없었던 것이다. 동생의 이야기 때문에 새삼 알게 되었다. 맙소사, 나는 왜 이걸 잊었을까. 욕실이 없는 집이라니, 어쩜 그럴 수 있었지? 난 왜 이걸 잊고 살았을까. 동생은 나의 ‘거실 없음’보다 ‘욕실 없음’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다. 우리의 이 무언가 ‘없음’에 대한 상이한 기억력 보존에 대해서도 궁금해진 그날의 대화를 통해 나는 잊고 있던, 어떤 면에서는 충격적인 과거의 경험들이 떠오른 것이다.

무슨 말이야? 의문이 생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 이야기를 건네니 한 친구는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언뜻 이해를 하지 못했다. 거실이 없어 엄마 방을 지나야만 나와 동생의 방으로 갈 수 있었던 그곳. 명자가 통닭을 열심히 튀기고 팔아 우리를 먹여 살렸던 그 집은 욕실이 없는 집이었다. 화장실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가게 현관 옆에 있던 곳을 사용하고, 우리는 방 뒤편의 바깥에서 씻고 살았다. 뭐 세수나 양치질이야 어디서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샤워를 하지 않고 산 것은 아닐 테니까...... 그렇다, 우리는 샤워도 바깥에서 해야 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싶겠지만, 우리는 정말 바깥에서 씻었다. 집 뒤편 옥상으로 통하는 공간 한쪽에 수도 시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바깥에서 겨울이면 물을 데워가며 씻고 살았다.


우리는 ‘욕실 없는 집’에서 살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말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과거의 우리에게는 매일매일의 일상으로 존재했음을 깨달았다. 명자와 나와 동생은 모두 대중목욕탕을 좋아하고 즐기는데 어쩌면 우리가 대중목욕탕을 좋아하게 된 기원은 욕실 없는 집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날 동생과 어쩐지 웃긴 기분을 공유하며 마무리하듯 나눈 말이었다. 물론 그 당시의 우리에겐 없을, 지금에서야 가능한 웃음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없음’으로 하여금 다른 감각이 생기고 다른 경험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새로운 시선이 생긴 밤이기도 했다.

나는 공유 공간에 대한 욕구와 필요를 많이 느끼며 살아온 사람이다. 아마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기도 하여서 ‘거실’이라는 공용 공간에 대한 기억이 임팩트가 컸던 것은 아닐까, 하고 동생과 이야기한 이후부터 생각해본 것이다. 셋방을 전전하고 망해가는 가게 집에서는 돈도 없고 거실도 욕실도 다 없었지만, 그것이 비루하고 초라하게만 느껴지기 보다는 새로운 발견과 감각으로 다가오는 지금의 ‘나의 몸’에게 어쩐지 고마워, 라고 말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물론 그런 경험은 누구든 갖지 않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이 글쓰기 덕분에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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