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불행한 기억이 낡아지길

by 수수

엄마아빠가 임금노동 현장을 합체했다. 서로 다른 직종에서 분투하며 생계노동을 하던 엄마와 아빠는 중국집이라는 새로운 요리의 세계에 도전하며 신장개업을 했다. 아, 이 말은 그들이 24시간 붙어 있는 불행을 맞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야채가게 맞은편 이층집으로 이사와 호프집을 했던 엄마는 다시 다른 맞은편 일층 중국집으로 일터를 바꾸며 야심차게 새로운 시작을 했다.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한 것은 이전 직장의 관점에서는 슬프게도 호프집이 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중국집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교회를 다니고 서로 맞은편에 살아 가족끼리도 친했던 언니오빠네 집이었다. 00반점 언니네는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고 기억한다. 결국 이후에 자신들의 가게도 빚으로 경매에 넘어가게 될지도 모르고 경매에 나온 가게를 인수한 부모는 중국집 사장님들이 되었다.

나의 중학교 생활은 짜장면 탕수육과 함께한 시절이기도 했다. 하교 후 친구들과 함께 다닌 속셈학원이 우리 집 옆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친구들과 그 골목을 지나갔다. 참새 방앗간을 찾듯 우리 집에 들렀다. 짜장면과 탕수육이라면 천하무적일 시절, 엄마와 아빠는 이 공짜 손님들에게 자주 짜장면이나 탕수육을 제공해주었다. 물론 명자는 호프집 장사를 할 때도 세 명에게 통닭 두 마리를 튀겨주곤 했다. 이런 먹거리의 인기가 곧 우리 집의 수입원이 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네 집에 놀러온 친구들을 부모가 밥 먹여준 것뿐이고, 그 집이 중국집이었던 것뿐이니까. 그것이 유료로 사먹어야 하는 것이었다면 우리에게 짜장면 일상이 열리진 않았을 것이다.


광주에서 스카우트 해온 요리사는 부모의 수입 중 가장 큰 지출을 차지하는 요소였다. 부모의 허리를 휘청거리게 했던 그는 몇 달 후 그만두었다. 부모는 그에게 지불해야 할 비싼 임금을 소화하고도 우리 네 가족이 먹고살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어느 날부터 아빠가 중국집 주방장이 되었다. 물론 아빠는 요리를 잘하긴 했지만, 어깨 너머 배운 솜씨로 주방장이 되어 중국집을 이끌어 가기엔 글쎄. 역시나 역부족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빠의 중국요리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짜장면 맛이 고정적이지 않고 자꾸 달라지는 것이 그것인데, 아빠가 한 짜장면도 탕수육도 모두 맛있었지만, 매일 바뀌는 맛까지 옹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건 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우리 집이 중국집이었던 때는 내 부모의 열정이 내게 직접적으로 확인되는 시간이었고, 동시에 내 부모의 백수 같은 한가함이 매순간 확인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빠른 음식 제공이 생명일 중국집에서 배달은 느리고, 맛은 바뀌기 일쑤인데 사람들이 북적이는 가게이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을 테다. 나에게 중국집에서의 생활은 원 없이 짜장면을 먹을 수 있는 부러움과 즐거움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부모의 한숨이 늘어가는 가난의 늪이기도 했다. 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열심에도 불구하고 빚이 늘어가고 더욱 더 가난해지기만 할까. 이들의 피를 짜내 배불러가는 이들은 누구인가. 개개인이 잘나지 못해서 가난하고, 뒤처지는 것이라는 목소리는 진실일까. 과연 요즘 화두가 되는 공정에 부합하는 당연한 결과인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TMI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운동을 시작했고, 대선 정책으로도 거론되기 시작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운동을 해왔다.)


부모가 서로 일하는 공간이 같을 때, 그리고 그 부모가 같이 일하는 곳이 자녀에게는 곧 생활공간일 때 부모의 민낯은 자주, 너무 쉽게 자녀들에게 공개된다. 서로가 각자일 수 있는 시간이란 것을 가질 수 없으니 서로를 향해서 쉽게 날이 선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자녀에게 이어진다. 처음으로 과도를 옆에 두고 혼자 방에서 울었던 것도 그 집에서의 경험이다. 엄마와 아빠는 그 전에도 다정한 적이 없었지만, 중국집에서의 삶은 매우 좋지 않았다. 결국 그 집에서 엄마와 아빠는 헤어졌다. 물론 그 집에서 함께한 경험만으로 두 사람의 이혼이 이뤄진 건 아니겠지만, 더 지속되지 않고 마무리된 곳이 그곳이긴 했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귀빈반점. 잘 살아보겠다고 시작했던 짜장면 장사는 결국 망했고, 부모도 그 집을 끝으로 다시 남남이 되었다. 2020년에 오랜만에 함평에 갔을 때, 이십 년 전의 낡은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귀빈반점을 보았다. 이곳에서 나는 행복했나, 아니면 불행했나.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그때의 삶을 나눌 수 있나. 이곳에서 엄마는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그럴 거면 차라리 이혼을 해’ 답답해하던 나에게 ‘어린 네가 붙잡아서 이혼할 수 없었다.’고 말한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릴 것만 같다. 낡은 귀빈반점처럼 우리의 불행한 기억은 낡아 헤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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