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남녀공학 공립중학교(A) 1곳과 사립여중(B) 1곳이 있다. 사실 첫째가 아들이었다면 어차피 배정받는 곳이 뻔하니 상관없겠지만 딸이라 생각이 많았다.
A는 남학생의 숫자가 여학생에 비해 2배나 많은 곳이다. 선배엄마들의 평에 의하면 면학분위기는 B가 더 좋은 편이나 아무래도 수행평가에는 꼼꼼한 여학생들이 우세하다 보니 내신 받기는 A가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만약 특목자사고 갈 것이 아니면 내신이 중요한 게 아니니 중학교 기간을 공부습관 잡는 시기로 보자면 B가 나을 수도 있다고 했다.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친구들에게 휩쓸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잘하는 친구들과 함께하면 은근 욕심을 내는 아이다. 지금 다니는 영어학원은 대략 한 학년에 600명 가까이가 다니는 대형영어학원인데, 한 달에 한번 월례고사를 보고 전체 학생 성적표를 각 가정으로 보낸다. 상위 30%만 이름을 써서 말이다. 학생들의 인권과 정서를 최우선으로 하는 공교육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엄마들은 이에 환호하며 이 학원에 보내려고 애를 쓴다. 학교에선 절대 알 수 없는 아이의 수준을 이렇게 상세히 알려준다니 나도 사실 혹해서 입학테스트 신청을 했었다.
시험 보는 날, 딸과 나는 끝반에라도 붙을 수나 있겠냐며농담을 했었다. 그런데 그날 본시험에서탑반을 배정받고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내 생각에 유지 비결은 바로 탑반 친구들의 의욕 넘치는 모습과 이름이 적힌 성적표 덕분이다.
딸은 순하게 보이지만 승부사 기질을 가졌다. 그런데 문제는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쉽게 풀어진다. 분명 학원에선 열심히 공부해야지 마음먹었다고 하고선 집에 와 늘 퇴근 후 TV시청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아빠 옆에 바짝 붙어 깔깔댄다. 숙제는 안드로메다로 보냈다가 가기 직전에야 발등에 불 떨어진 듯 안달한다. 솔직한 마음에 공부도 안 할 거면 잠이라도 일찍 잤으면 좋겠는데 전교 학생 중 앞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꼬꼬마는 늘 성장호르몬을 활성화할 생각이 없다.
암튼 그런 기질로 보면 B가 나은데 B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집에서 A보다 멀다는 것이다. 사실 멀다고 해도 지금 초등학교 바로 옆이지만 등교시간이 당겨질 테니 가까워야 한다. 딸은 야행성이라 밤에는 안 자려고 하고 아침엔 잘 못 일어난다. 아무래도 중학교 땐 절대 지각하면 안 되니 일단 가까운 게 최고다 싶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기숙사에 사니 절대 지각할 일 없다며 청심국제중(여름방학 때 캠프 다녀옴)에 원서를 내기도 했는데 18:1의 경쟁률 속 1차 추첨에서 광탈했다. 그리고 딸은 아직 생각이 없지만, 난 혹시 능력만 된다면 특목자사고에 보낼 생각도 있다. 이는 절대 내신과 출결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엄마인 내가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어차피 뺑뺑이로 정해질 일이니 말이다.
오전에 중학교 배정문자가 왔다.
결국 A로 배정됐다. 난 딸에게 A학교의 좋은 점을 잔뜩 적어 축하 문자를 보냈다. 딸은 내 축하문자에 짜증을 가득 담아 답했다. 분명 전에 물어봤을 땐 크게 상관없다더니 마음속 저울은 B를 향해 좀 더 기울어져있었나 보다. 거기에 많지 않은 친한 친구들이 전부 B로 배정받자 마치 원래부터 그 학교 입학을 간절히 바랐는데 떨어진 아이처럼 굴기 시작했다. 엄마의 축하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짜증 유발 멘트로밖에 안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 너무 속상하니 그러는 거겠지' 하며 욱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이아빠는 첫째가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좋아하는 육회를 주문했다. 육회를 먹으며 기분이 좋아진 아이가 내게 말했다. 제 딴엔 아까 짜증을 냈던 것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이제 더는 중학교 배정 일로 짜증 내지 않을 게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도 못 믿겠어요."
"왜?"
"내 기도는 항상 안 들어주시잖아요."
아이가 평소 잘 안하는 기도까지 했다니.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는 데 꽤나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미안한마음이 들어 살짝 뜸을 들였다 멋쩍게 말했다.
"그게. 사실 엄마가 A로 배정되라고 기도했어. 엄마 기도가 더 간절했나 보지. 그러길래 더 열심히 기도했어야지."
아이의 표정엔 황당함이 번졌다. 뒤이어 원망섞인 괴성도 함께 들려왔다.
이제 딸의 등교시간이 내 출근시간과 같아졌다.
"딸아, 이제 엄마 손잡고 학교 가자. 초1 때도 못해본 같이 등교를 중1 때 해보겠구나. 기대된다는 말은 좀 낯간지럽고 제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