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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앙마 Mar 09. 2024

찻잔을 깨트렸다

소소하지만 소소하지만은 않은 나의 이야기

"엄마, 배고파. 빨리 밥 줘."

 학원 스케줄이 없는 토요일이지만, 주중에 다 끝내지 못한 것 때문에 학원에 불려 갔다 온 아이가 오자마자 저녁을 채근했다. 쫓기는 상황이 되면 당황해서 더 뭔가 손에 잡지 못하는 스타일인 데다 내 손은 여자치고 꽤 크고 뼈대가 굵은 손이라 사부작사부작 손으로 하는 일에 늘 굼뜬 편이다. 배고픈 아이에게 빨리 저녁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마음과 달리 저녁준비에 속도가 잘 나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 들어 새롭게 시작한 일이 많아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이 무척 힘들어졌다. 요리를 하다가도 다른 일이 생각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놓기를 계속 반복했다.


 자꾸 주방 근처를 들락거리며 재촉하던 아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며 짜증을 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아이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다했다며 담을 그릇을 꺼내기 위해 싱크대 위 선반장을 열었다. 너무 서두른 탓에 장을 지나치게 힘주어 열었나 보다. 장이 흔들리며 균형을 잃은 무언가가 내 오른쪽 시야를 스치며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분명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잡으려 했다면 잡았을 텐데 순간 내 눈에 비친 그것이 너무 현실감 없이 느껴져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와장창?'(아니 무심하게 툭! 이 더 맞는 것 같다.)

 결국 바닥으로 떨어진 그것이 요란한 소리 아니 오히려 둔탁해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할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그건 결혼할 때 남편 친구가 부인이 골라준 거라며 선물했던 포트메리온 보타닉 커피잔 세트 중 한 커피잔이었다. 당시만 해도 포트메리온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고 더 값어치 있었기에 소중한 친구의 결혼 선물로 손색이 없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도 된다고 백화점에 갓 구입한 영수증과 함께 선물 받았던 커피잔 세트! 그 세트를 처음 본 순간, 한눈에 반해버렸다. 6개의 커피잔에 각각 그려진 예쁜 꽃 그림들이 너무 영롱해 보였다.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꺼내서 부엌 선반장 안에 예쁘게 정리해 두었다.


 아끼다 똥 된다고 했던가?

 막 선물 받고는 아끼느라 꺼내지 못했다. 친구나 지인이 놀러 왔을 때나 한두 번 꺼냈던 것이 다였다. 그러다 출산을 하고 독박육아로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여유를 갖고 차를 마실 시간도 없거니와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도자기로 되어있는 컵을 꺼내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 줄 알기에 또 꺼내지 못했다. 그러고 났더니 독박육아에 워킹맘의 삶이 덧입혀져 더욱더 정신없는 삶이 이어졌다. 결국 내가 반했던 6개의 예쁜 잔들은 우리 집에 온 지 14년 차가 되었음에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해본 적이 거의 없다.


 방금 막 깨진 그 잔은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차를 담근 적이 있었을까?

 너무 간간이 한두 잔만 꺼냈기에 실제로 한 번도 쓰지 않은 잔도 있을 터였다.


 그런데 참 우습다. 전에 그렇게 아끼던 잔이 깨진 건데도 별로 속상한 마음이 크지 않았다. 그저 요즘엔 포트메리온 커피잔이 얼마쯤 하나 살짝 검색해 봤다. 이제 흔해져 버려선지 가격마저 떨어져 한 잔에 2만 원이 살짝 넘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2만 원도 그냥 버리기에 너무 아까운 금액이지만 14년을 끼고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똥이 돼버린 것이 어이없었던 것이다.


 이제 자주 꺼내 들어야겠다.

 어찌 보면 이젠 아이들도 많이 컸고 내가 여유 시간을 내려고 하면 낼 수도 있을 터였다. 계속 무엇인가 하고 성취해 보고자 쳇바퀴에서 내려오지 않는 건 오로지 내 의지라는 게 너무도 분명하다. 늘 바쁜 삶에 투덜대고 있지만 나를 가장 혹독하게 혹사시키는 게 바로 나다.


 이것저것 다 하고 싶다고 손 들어 놓고 막상 다 하려니 도망치고 싶은 요즘이다. 이미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리 더 잘하려고 애를 쓸까? 여전히 누군가의 칭찬에 고파있는 내가 갑자기 너무 안쓰러워진다.


 괜찮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지금까지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잘할 거야!

다른 이의 칭찬과 인정이 아니라 스스로 보듬을 수 있는 내가 되어야겠다.


 깨진 잔을 정리하며 균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여유를 놓치고 있는 나 스스로를 어루만졌다.


 말 나온 김에 다른 커피잔을 꺼내 따뜻한 차 한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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