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드러난 내 불안
완벽주의자로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내 불완전함이 타인의 눈에 비치는 순간이었다.
나 자신에게 보이는 것은 견딜만했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채찍질하며 고쳐나가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약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일,
그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완벽주의자들이 겪는 실패는 대부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없으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 뒤에 수없이 고치고 또 고친 흔적들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그날, 엄마를 따라가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완벽주의자라는 사실을
조금 더 늦게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5학년,
엄마는 어디 가야 할 곳이 있다며 나를 깨웠다.
도착한 곳은 동네에 있던 국립 음악원(conservatorio)이었다.
내 의견을 중요하지 않았다.
"들어가 봐"라는 말 한마디에,
그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입학시험을 보게 되었다.
박자와 음정을 맞추는 테스트.
한국에서 피아노를 배운 덕분에 무난히 통과했고,
그렇게 나는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조금 더 바빠진 것을 제외하면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음악학원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작하고 3-4년이 지난 후에 찾아왔다.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서서 더 예민해져 있었던 탓이었을까…
어린 시절엔 그저 즐겁게 다녔던 곳이었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선생님은 더 엄격해지셨고,
아이들 또한 순수한 어린이가 아닌 서로 경쟁하는 존재로 변했다고 느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주변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완벽주의의 시동이 걸린 순간이었다.
연주할 때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 긴장하게 되었고, 온몸이 굳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나는 한 번의 큰 실패를 겪게 되었다.
음악원에서는 일 년에 세 번, 연주회가 열렸다.
학생들이 부모나 친구들을 초청해 그동안 배운 곡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 탓에 이런 연주회가 늘 부담스러웠지만,
어릴 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아직도 그날이 생생히 기억나고,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날 내가 맡은 곡은 느리고, 난이도도 높은 곡이었다.
바이올린을 켜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느린 곡이 때로는 더 어렵다는 걸.
비브라토나 활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컨트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평소보다 더 긴장됐다.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부터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손에 땀이 차서 바이올린 활이 미끄러질까 봐 괜히 몇 번이고 다시 잡아봤다.
심장은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고,
아무리 침을 삼켜도 목은 자꾸만 잠겼다.
연주 순서가 다가올수록 속이 울렁거렸다.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생각했다.
실수하면 안 돼. 단 한 음도 틀리면 안 돼.
그렇게 나는 무대에 올랐다.
어떻게 연주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단 하나만 기억난다.
아주 또렷하게.
곡의 마지막 음표만 남았을 때,
갑작스럽게 공포가 밀려왔다.
거의 끝나가는데... 왜?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떨리는 손,
흔들리는 활,
조용한 관객석 사이로 불안정한 음이 울려 퍼졌다.
피아노 반주자와 호흡을 맞춰
마지막 음을 끝까지 이어가야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고,
중간에 활을 멈춰버렸다.
그 순간,
나도 당황했고
관객들도 당황했다.
짧은 정적이 흘렀고,
그제야 어색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망했다.
울고 싶었다.
연주가 끝나고 선생님이 조용히 다가와 내게 말했다.
"활이 흔들려서 연주를 갑자기 멈췄다는 걸 알아.
하지만 다음에는, 흔들려도 끝까지 연주해야 하는 거야."
그 말이 내 마음을 찔렀다.
‘내 실수가... 결국 남에게도 보였구나.’
그 생각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날 이후로,
나에게 실수란 단순히 틀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들키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내 안에 ‘무대 공포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완벽하고 싶었던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