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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듕쌤 Jun 19. 2023

땡전 한 푼 없는 남자와 결혼했다.

삼십 대 초반까지, 겉으로 보기에 번지르르한 남자들을 만나며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받았었다.


좋은 학벌, 좋은 직장, 멀끔한 외모를 가진 그들은 모든 여자들이 원하는 소위 '엄친아'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만나려면 나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할 수밖에. 돈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비싼 옷을 사 입고, 비싼 데이트 비용을 내며 그들과 나란히 서려고 노력했다.


한 번 만날 때마다 10만 원은 그냥 쓰고,

2-30만 원 하는 공연도 보러 다녔다.


계속 얻어먹을 수는 없으니 그가 한두 번 내면 나도 한 번씩 눈치껏 내야 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데, 나는 통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좋은(?) 남자를 만나려면 어쩔 수 없는 법. 원치 않는 럭셔리한 척을 하며 데이트를 했지만 역시,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은 아무리 비싼 옷이어도 볼품이 없었다. 만남이 즐겁지 않으니 결국엔 내가 그들에게 차이는 듯한 형태로 연애는 끝이 났고 상처를 받기를 반복했다.


https://brunch.co.kr/@mindoongmj/45

[이상형을 찾아 만난 이야기]


금전적 혹은 외적 조건을 모두 배제하고 모든 것이 딱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성격만 보고 만난 그 사람은 정말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니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근근이 먹고사는 사람.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은 자기와 고시식당에 가자고 했다. "여기 내가 자주 가는 곳인데 싸고 맛있어!!" 한 끼에 4천5백 원. 고시생들이 쿠폰을 사놓고 밥을 먹는 곳이었다.


처음 가본 곳이기도 했고 직장생활 당시 회사 식당이 떠오르기도 해서 어찌저찌 먹을만했지만 이전에 하던 데이트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보통 여자들이 이런 남자를 만나면 둘 중 한 가지 입장을 취한다.

1. 취직하라고 권유하거나,

2. 헤어지거나.


하지만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직장생활을 겪어보며 맞지 않는 조직생활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작 금전적인 이유 때문에 나와 꼭 맞는 사람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은 내가 그동안 봤던 그 누구보다 성실했고, 정직했으며, 내게 솔직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모두 경험해 보느라, 돈보다 다른 가치를 우선시하느라 통장이 비어있었을 뿐, 절대 하루를 허투루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전의 나는 연애를 할 때, 혹은 하지 않을 때 늘 외로웠다. 연애를 하는데도 왜 외로웠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있을 때보다 더 가슴이 쓰리고 사무치게 외로웠던 적도 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집착 아닌 집착을 하며 연락을 강요하거나 좀 더 만나달라고 매달리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사람과 만나면서는 하나도 외롭지 않았다.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두 사람 다 사치를 하지 않기에 쇼핑을 가거나 비싼 데이트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일들을 하지 않아도 행복했다.


가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는 데에 돈을 쓰기는 했으나 이 또한 남들에게 보여주는 '멋있는 식사'가 아닌 진짜 '맛있는 식사' 집중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통장 잔고.


모아둔 돈이 없다면 결혼은 꿈도 못 꾸었다. 당시 나는 이미 결혼을 포기(?)했거나 더 이상 결혼에 집착을 하지 않게 된 상태였기에 가진 돈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나 스스로를 설득했다. 2룸에서 전세 생활을 하는 나의 자취 집에 그가 몸만 들어와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냥 우리 집에서 같이 살까?"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이야기를 꺼냈다.


"나 사실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받은 상속금이 조금 있어."


결혼하고 싶으면 그 돈으로 할 수 있다고, 식은 안 올려도 같이 살 집 크기는 늘릴 수 있다고 했다.


"응? 조금이 얼만데?"

"1억 정도?"


세상에.


지금 세상에 집을 사기엔 택도 없는 금액이라지만 스스로 모으려면 끝도 없는 금액이었다.


당시의 난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과 강사 생활을 하며 알뜰하게 모은 돈 등을 합쳐 1억이 조금 안 되는 돈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즉, 돈의 출처는 조금 다르나 양쪽이 비슷한 돈을 갖고 올 수 있는 상황이 된 것.


그리고 지방에 계신 시어머니의 적극적인 결혼비용 지원 어필에 식도 안 올리고 대충 같이 동거나 하려던 우리는 결국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직접 주문제작한 본식 드레스


내 경우엔 운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땡전 한 푼 모으지 않았던 신랑을 만난다는 게 잘한 일인지 아닌지 누구도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난 그를 만난 게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로지 그 사람의 정직한 성품과 성실한 생활방식만을 보고 판단했고 결혼 후 1년이 지난 지금도 투닥거리기는 하지만 이 사람을 만난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만약 훗날 금전적인 문제가 생겨 허우적거릴 일이 생기더라도 이 사람을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내 마음이 이렇게나 평온해지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난 정말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누군가 보면 '이기적이다'며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나의 신랑은 그런 이기적인 모습들 까지도 "네가 그래서 멋있어."라며 칭찬해 준다. 잘난 척하는 다른 남자들처럼 나의 단점들을 약점 삼아 내 자존감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통장에 모은 돈이 땡전 한 푼 없던 그는 지금도 돈이 안 되는 일들에 열을 올리며 열심히 산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산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남자란 자고로 자기 밥값만 제대로 할 줄 알면 되는 게 아닐까? 하며.


오늘도 축구수업(그의 현재 본업)하고와서 수건빨래며 설거지를 완벽히 마친 뒤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서겠다고 집을 나섰다.


"할 일 다 했으면 됐어. 잘 다녀와~"


우리의 결혼생활은 남들과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두 사람이 만나 꽤나 순탄하게 흐르고 있다.



신랑이 출연했던 유튜브 다큐멘터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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