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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Dec 02. 2020

그날 밤, 흑산도 주변을 맴돈 이유

ep. 2

 

 서해의 남단,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점 어간에 흑산도라는 섬이 있다.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 이름 붙은 이곳은, 목포의 서남쪽 97.2km에 자리잡았다. 우리나라 섬 중에서 꽤나 큰 섬으로 주민도 2천 명이 넘고, 면적도 20제곱km로 여의도의 2.5배에 달한다.


 목포에서 쾌속선으로 질주해도 4시간이 넘게 소요되는 거리에 있어, 6.25를 소문으로만 듣고 지났다는 말도 전해지는 외딴 영토다. 몇 년 전 여행 관련 TV프로그램에 소개되며 이름을 아는 사람이 늘었지만, 10년 전엔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함정에서 근무할 때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다. 당시 우리 배는 서남해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번 출동 나가면 2주 정도 임무를 수행하고 모항으로 복귀했는데, 우리의 출동으로 서남해역 전선은 철통같이 지켰지만, 그 배를 타고 있는 수많은 청춘들의 연애전선에 2주간의 연락두절은 전운이 감도는 위기의 시간이었다.

장거리 연애만으로도 어려움이 큰데, 한 달에 2주씩 연락 안 되는 사람이라니. 결혼에 성공하고 가정을 잘 꾸리고 있는 선배들이 대단해 보였다.  


 바다에 나가면 통신 기지국과 거리가 멀어져 전화가 불통이 된다. 카톡도, 영상통화도 없던 시절, 출항해 바다로 나가면서 희미해지는 전파를 부여잡고 소중한 사람들과 마지막 통화를 한다.


 육지에서 멀어질수록 신호가 약해지고, 안테나가 한 칸 남으면 전화 목소리가 먼저 끊어진다. 마지막 한 칸이 간신히 신호를 붙잡고 있을 때, 함교로 올라가 전화기를 높이 들면 문자가 보내지기도 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든 전화기 화면을 올려보다 간신히 문자 발송에 성공하면, 폴짝 뛰며 좋아하던 청춘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곤 이내 외부와 단절된 세계로 빠져든다. 2주간의 출동은 마음도 힘들지만 몸은 더 힘들다. 하루에 8시간 이상을 서 있어야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굉음을 내는 찜통 같은 기관실에서 당직 임무을 선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밥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추운 겨울날 바다 한가운데서 칼바람을 맞으며 주변을 살펴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는데, 갑자기 죽어있던 휴대폰 기지국 신호가 하나 올라온다.


망망대해에서 갑자기 신호가 왜 잡혔을까? 레이더를 보니 저 멀리 섬 하나가 보인다.


 꽤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 흑산도에 통신사 기지국 세워졌고, 그 손길이 바다를 지나는 우리에게 까지 뻗친 것이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핸드폰 터진다’를 귓속말로 전하며 다들 갑판 밖으로 나와 휴대폰을 이리저리 치켜들어 본다. 그간 발송은 됐지만 수신자가 사라져 허공을 맴돌던 문자들이 흑산도 옆 바다에 떠 있는 휴대전화로 날아든다.  


 우리배 위치 변화에 따른 통신 연결상태를 분석해보니, 기지국의 신호 송신 거리는 20km 정도로 추정되었다. 나는 당직사관으로 배를 조함하고 있었기에, 배는 내가 지정한 곳으로 향하고, 속도도 내가 정하는 것이다. 기본 항로를 벗어날 순 없지만 속도는 조절이 가능하다.

배의 속도를 늦췄다.


 동료들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다고 합리화했지만, 사실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와 좀 더 연락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내가 애타게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면 흑산도를 무심히 쓱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속도를 늦춰 천천히 지나간다. 함장님도 아시는지 모르는지 별말은 없으시다. ‘함장님도 전화기 들고 갑판 어디에 나와 계시려나’ 상상도 해본다.

  

 내 당직시간이 종료되고 다음 당직인 선배가 함교로 올라왔다. 의미심장한 미소로 서로의 의사를 교환한다. 그날 밤, 흑산도 주변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간신히 잡고 있던 그 신호가, 여러 청춘의 연애전선에 단비가 되어 내려앉았다.

  

칠흑 같은 그 밤, 나의 전선에도 촉촉한 단비가 내렸다.     




 2020년, 지금은 달라졌을까?  

흑산도를 비비는(?) 추억도 이제는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은 작전보안 유지를 위해 출동 나가는 함정 승조원들의 휴대전화를 모두 걷는다. 연락 수단 자체가 사라졌다. 긴 시간 출동임무를 수행하는 함정 근무자들의 연애전선에 감돌 긴장과 전운이 염려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동서남해 그리고 파병지의 먼바다에서 외롭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글을 읽는분께서 짧은 순간이라도, 바다 위 외롭게 흔들리고 있는 그들의 안전항해를 기원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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