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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Nov 13. 2020

악성 민원인 대응 방법

새로운 대화법의 발견


 악성 민원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사람까지 생겼다는 뉴스를 처음 접한 건 꽤 오래되었다. 담당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던 시절을 지나, ‘감정 노동자’란 말이 생겨나고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병폐로 대두되었다. 악성 민원을 접하게 되면 마음의 상처는 물론 삶의 의욕이 떨어지고, 두려움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정신을 잃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민원인도 계속 민원을 넣으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이유가 있기에 행동하는 것이다. 악성 민원인을 수준(?)별로 구분해보자.


레벨1. 울면 떡 하나 더 준다고, 귀찮게 하고 떼써 하나라도 더 얻어 가려는 유형이다. 담당자가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허용범위 내에서 최대한 배려해 주기 마련이다. 이런 심리를 노리고 민원을 도구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레벨2. 상대를 괴롭히고 곤란하게 해 우월적 지위를 확인받으려는 유형이다. 작은 문제, 사소한 실수를 가지고 엄청난 피해를 당한 것처럼 부풀려 자신에게 고개 숙이도록 만든다. 상대로부터 공손한 태도로 사과받으며 자존감을 확인하고, 담당자가 아닌 관리자와의 접촉을 심리적 지위 상승 기재로 활용한다.


레벨3. 끝판 왕으로, 희열을 느끼는 유형이다. 하나의 민원이 자가분열을 거쳐 수십 개로 늘어난다. 상대를 곤란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새로운 시빗거리를 창조해낸다. 이 레벨은 무논리가 아니다. 연구와 개발을 거듭해, 담당자보다 관련 지식에 더 해박한 경우도 있다.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레벨1, 2와는 차원이 다르다. 희열을 느끼지 않는다면 돈을 받더라도 하지 못할 일이다.


 레벨3급 악성 민원인을 만나면 업무가 마비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악성 민원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이들이 몇 명 있다. 그중 한 명을 만난 경험이다.


 그의 아들은 군대에서 상사에게 뒤통수를 한 대 맞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기에 당시의 상황에 대해선 논외로 하자. 수사가 진행되었고, 상사는 폭행으로 형사처벌과 징계처분을 받았다. 원칙대로 처벌받았고, 논란의 여지는 없었다. 그의 아버지 Y가 등장할 때까지는.


 Y는 유명세를 떨치는 내공 깊은 악성 민원인이다. 그의 민원은 하나로 시작해 곧 수십, 수백 개로 자가분열했고, 그가 휘두르는 광선검에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입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부대의 조치, 조사 과정, 시간, 방식, 처벌에 관한 문제제기부터 병원 진료, 의무기록, 진단서, 후유증, 가해자의 보직 이동, 아들의 부대 이동까지 이어지곤 결국 민원 담당자에게까지 손길을 뻗어 담당자의 답변태도, 말투, 정보공개 등 끝날 기미가 없었다.


 누가 봐도 정상적으로 처리된 일이고 더 이상 문제제기는 시간 낭비와 괴롭힘에 불과했으나, 그의 집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일병이었던 아들이 전역하고 나서 2년이 더 지날 때까지 민원 릴레이를 이어가던 중, 나와 만나게 되었다.


 전임자로부터 인계받으며 이런 사람이 진짜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책 한 권이 될 법 한 그간의 기록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제 좀 그만하겠지’라는 희망은 헛된 것이었고, Y는 여전히 하이에나처럼 새로운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여성 직원이 그를 대응하다 현기증을 느끼고 나에게 SOS를 쳤다. 올 것이 왔다.


 첫 대면부터 시비조다. 담당자가 왜 자꾸 바뀌냐부터 시작해서, 10초에 질문을 하나씩 한다. 대답할 시간도 없다. 비꼼과 비아냥은 수용 가능한 수준을 넘나들었고, 나의 목소리도 점점 날카로워졌다.


 어찌 되었든 논리로 상대해야 한다. 그의 주장에 반박하며 지루한 통화를 이어가던 중, 그가 내 사무실 전화기의 통화기록을 요구했다. 이 전화기의 통화기록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안다고 하더라도 제공하는 자료가 아님을 설명했더니, Y가 말했다. ‘당신 사무실 전화기 통화기록은 00부대 00통신대 서버에 저장되어 있으니 거기에 물어보라’. 거기에 있더라도 제공할 자료가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순간 당황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사실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파고드는 사람인 것인지. 놀라운 집념이었다.


 몇 차례 더 그의 전화를 받고서,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자기 말만 한다. 대화의 99%를 자기가 주도하고, 물어 놓고는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꼬리를 무는 질문으로 자신의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혼동하게 만든다. 이런 식이다.


‘아까 전화 왜 안 받았어요?’

안 받은 게 아니..

‘군인이 전화 안 받아도 돼요?’

다른 전화를 받..

‘공무원 전화 응대 지침이 어떻게 되어 있어요?’

지금 그게 아니..

‘내 전화번호 뜬 거 보고 무슨 작당한다고 바로 안 받아요?’

물었으면 대답을 들..

‘이런 식이니까 내 아들이 폭행당할 때 제대로 처리가 안된 거 아니에요?’

'....'


 이런 대화는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말을 할 틈이 없어 주도권을 상실한다. 내가 터득한 대응법은, (이제야 본론) 같이 말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말할 때 말을 멈추는 이 세상 상식은 그에게 통하지 않기에, 나도 상식을 벗어나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나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갔다. 그도 말하고 나도 말한다. 급할 게 없기에 천천히 또박또박 말할 수 있다.


 그러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말하면서도 상대방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20분 정도를 서로 말하다 보면 서로가 상대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상대가 말하는 게 뭔지도 이해할 수 있는 놀라운 소통방식이다. 새로운 대화법을 발견했다고 학계에 보고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Y는 그 이후로 나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흥미를 잃었을 것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악성 민원인의 전화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제 악성 민원은 사회적 병폐이자 하나의 범죄로 인식되고 있기에, 너무 수세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억지 주장이나 생떼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고통받지 말고, 적절한 대응법을 찾아 내 대응하시라. 같이 말하기. 내가 찾은 Y 대응법이었다.




* 상황에 따라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Y는 자기 말만 계속하기에 고안한 방법이었다. 모든 악성 민원인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내 말만 한다면 일이 더 꼬일 수도 있다. 상황의 특성을 고려해 현명한 대응법을 발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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