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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녁설 Sep 30. 2020

문경세제? 아니라 문경새재

슬기로운 달빛 생활 (5)

 20살 이후 학교를 위해 상경했다. 이후 내 자기소개는 항상 똑같은 형식으로 이뤄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xx대학교 (학번) xxx입니다." "경상북도 문경출신이고요...."


그럴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와서 물어보곤 했다.


"문경??"

"문경새재!!"

"문경새재 할 때 문경 맞죠??"

 

천안 호두과자, 안동 찜닭 같이 문경새재는 문경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다.


물론 내 또래 대다수는 문경새재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른다. 그냥 스치듯 들어본 잔상 같은 것일 뿐...

그래서 내 친한 동생은 문경에 왜 세제가 유명한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 말을 듣고 그냥 웃으며 문경새재는 대관령 같이 다른 지역을 넘어갈 때 사용하던 고개라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외지인에게는 그냥 어디서 한번쯤 들어본 곳에 불과한, 자동반사처럼? 연상되는 곳이지만 문경 사람에게 문경새재는 곱씹을 추억 하나 쯤은 있는 그런 장소이다. (마치 서울 사람이 한강과 관련된 추억이 하나씩은 있듯 말이다.)

 

많은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얘기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 새재는 힐링의 장소다. 마음이 많이 복잡할 때 새재를 방문하곤 했다.

재작년 겨울 좀 생각 많을때 방문했던 문경새재 3관문.

 문경새재가 나에게 힐링의 장소로 정해진 이유는 나만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문경새재가 좋진 않았다.

 태생이 집돌이인 나에게 집 밖에 있는 새재란...

그것도 3 관문까지 가려면 오전은 꼬박 잡아야 하는 새재를 가는 것은 그닥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새재가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일련의 계기 같은 것이 필요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재가 좋아진 이유는 극적인 한 번의 계기 때문이 아니라 꾸준한 학습의 결과물이랄까..?


과거 얘기를 좀 하자면...

 

 어릴 적 나와 어머니 사이에는 크고 작은 소란이 많았다.(뭐 대부분의 모자관계에서 일어날 흔한 일들로 인한 소란이다. 어릴 적 나는 꽤나 말썽꾸러기였다. 학교에서 하는 방과 후 수업을 가기 싫다고 두 달이나 마음대로 안 가고 밖으로 놀러 다녔다. 그리고 하나 있는 형은 말도 잘 듣고 순한 편이라... 말썽꾸러기 둘째 아들이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 혼나다 보면 결코 조용히 혼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 꼭 혼나며 한 마디 씩 거들다가 선을 넘으면 보다 못한 아버지가 나서서 나를 방으로 데리고 온 후 훈계하셨다.

  

 그러다가 가끔 주말이나 쉬는 날 어머니와 소란이 생길 때 아버지는 조용히 지켜보시다가 김밥 세줄과 물 두병을 챙겨 나를 방이 아닌 문경새재로 끌고 가셨다.(사실상 데리고 같은 표현도 있지만 끌고 갔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항상 가기 싫다고 말하였지만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혀 "됐어 따라와" 하면 따라가야 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툴툴대며 짜증 내다가 도중에 아버지께 더 혼나기도 하며 올라갔다. 그래도 3 관문에 도달해서 챙겨 온 김밥과 컵라면, 감자전을 먹고 나면 어느새 마음이 풀려 내려올 때는 싱글 생글 재밌는 얘기를 하며 내려오곤 했다. 그렇게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으면 아버지는 나에게 물었다.


"아들, 오니깐 그래도 좋지?"


 고집불통 경상도 남자애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때 만은 그냥 마지못해 웃으며 "응" 하며 인정하곤 했다.


 아버지만의 문경새재 교육법은 이후에 몇 번 더 행해졌다.

이 교육법을 충실히 수행하며 새재의 자연경관과 깨끗한 물소리에 마음이 진정된 경험을 몇 번 하고 난 뒤 마음이 복잡하면 새재를 찾는 게 익숙해졌고 좋아졌다.


이런 문경새재가 달빛 탐사대 로컬 탐사 코스로 일정에 있었다.

그렇게 아빠와 둘이서가 아닌 만난 지 얼마 안 된 탐사대원들과 문경새재에 동행하게 되었다.

탐사대원들과 새재 동행을 위해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첫날 ot때 탐사 pd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과거에는 문경읍부터 문경새재까지 굉장히 많은 주막이 줄지어 있었다고 해요. 사람들이 머무는 주막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은 외지에서 많은 방문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문경 사람들은 외지 사람들에 대해 폐쇄적이지 않고 개방적이에요. 그런 문화가 오랜 시간 이어져 오면서 문경 사람들의 DNA에 개방적인 요소가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해요...(중략)... 영남 지방의 사람들(외지 사람들)은 각자의 꿈을 갖고 이곳을 지나갔다고 해요. 꿈을 가진 여러분들 문경에 와서 각자 하고 싶은 일 다 이루시길 바랍니다. 문경은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약간의 변형이 있을 수 있겠고 정확한 내용을 기억할 순 없지만 피디님의 말씀은 대략 이러한 내용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후천적으로 얻게 된 특징들은 유전이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문경에 살던 조상들의 외지인을 맞이하며 쌓인 경험이 관용적인 성격으로 변하여 후대의 DNA로 남아 유전될 수는 없다.(이래서 이과는 좀...)

 아무튼 뭐가 맞는지도 모르는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피디님 말씀을 토대로 과거 문경의 모습과 이곳을 지나던 사람들을 상상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가면 얼마나 따분하고 심심했을까? 그러다 보면 옆에 있던 사람에게 말 한마디 걸고 싶지 않았을까? 물통에 물이 없어 좀 달라하기도 하고 가다가 길을 잃어서 길도 물어보고... 그러다가 서로 연고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밤에 주막의 평상에 모두 모여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달빛 아래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며 잠에 들고... 그렇게 친구가 되어 먼 한양까지의 길을 동행하고...

    

생각만 해도 너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인가...


 이러한 장면을 떠올리며 달빛 탐사대가 이를 현대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과거 꿈을 갖고 모여든 사람들과 지금 꿈을 갖고 모인 달빛 탐사대 간에는 꽤나 유사한 점이 많다. 이곳에 예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듯 달빛 탐사대원들도 각자 좋아하는 것도 살아온 세월도 상이한 사람들이다.

 

  이곳에는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각자의 삶들이 존재했다. 크루즈와 스튜어디스 일을 하며 한반도를 넘어 지구를 터전으로 살던 분도 계시고 음악으로 전국을 들썩이게 하시는 분도 계셨다.

 나처럼 누군가 가라고 하는 길이 아닌 자신의 삶을 개척하신 분들이었다.

 각 지역에서 공부만 하던 그 당시의 유생들 보다 더 많고 폭넓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었고 그 경험의 농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진했다. 이러한 분들과 밤에 막걸리 대신 맥주나 한 잔 하면서 얘기를 듣는다? 이것은 정말 낭만적이고 평생에 몇 번 없을 기회 아닐까? 그리고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 가본 길을 들으며 내 길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든 순간 문경새재에 도착했다.

그리고 저 멀리 기다리고 있는 대원들이 보였다.

 

이후 차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아는 척을 해주셨다.


"왜 오전에 안 왔어? 오늘 안 오는 줄 알았잖아"

"오전에 공간 DIY 하는 거 힘들어서 안 온 거 아니지ㅎㅎ?"


 이렇게 약간의 인사를 나눈 뒤 발열체크 후 본격적으로 문경새재 트래킹을 시작했다.

문경새재 1관문까지는 그곳에 비치된 전동차량?을 타고 편하게 올라갔다. 새재에 많이 와 봤지만 그 전동차량을 타고 간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타고 올라가니 너무 편했다.

 하 이것이 문명인가...

 

올라가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 반응을 하나하나 주시하며 올라갔다. 처음 문경새재에 방문한 대원들은 문경새재의 절경에 감탄하기 바빴다. "와 물이 너무 맑아요", "공기가 너무 좋아요" 등

 뭔가 우리 지역에 내가 좋아하는 곳을 남들도 좋아해 주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도 적지만 문경새재에 관련된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과 몇 년간 꾸준히 방문해 오면서 알게 된 꿀팁들을 공유했다.

 

"이곳은 ~한 업적을 가지신 분을 기리는 비석이며, 여기는 김밥 먹기 좋은 곳이고, 저기 폭포가 보이면 2관문에 다 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등 오랜 시간 새재에 방문하며 느끼게 된 것과 알게 된 것들을 두서없이 마음껏 나열하였다.


 그렇게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 누구는 더워서 머리에 수건을 감고 올라갔고 다른 이는 빠르게 2관문의 전경을 보고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으며 또 다른 이는 문경새재가 보여주는 절경들에 감탄하며 느리게 오느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재촉하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걸어가며 자신만의 사연을 더해갔다.



산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듯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각자 꿈을 갖고 새재를 올라가던 과거 사람들도 어린 시절 불만 가득히 새재를 오르던 한 장난꾸러기에게도, 이 날 새재를 오른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 또한 언젠가는 끝에 도달할 것이다. 공식적인 프로젝트 종료일이 되면 다들 어떤 사이가 되어 있을지 어떤 결과를 낼 수 있는지 어떤 감정일지를 복합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아직은 좀 막막하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바라는 것은 확실해졌다.


 과거 선비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아름답게 수놓았듯 우리가 하는 활동도 문경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할 수 있는 아름다운 징검다리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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