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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Aug 09. 2021

바람이 분다, 가을이 왔다.

-반복되는 기억과, 이터널 선샤인-

내일 낮에는 다시 여름이 올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 밤에는 바람이 불고 가을이 왔다. 


아침이 밝아오고 한 낮이 되면 

다시 기온은 33도를 훌쩍 넘어버리고

잔인한 햇빛에 두 눈이 따끔거리는 여름이 올지 모르지만,


여하튼 오늘 밤엔, 

옆집 처마 밑에 걸린 풍경이 요란스럽게 울고 

간혹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가을밤이 왔다.      


<서울 다른 동네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밤 종로구 평창 15길에는 많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왔다>


2021년, 올여름 한낮의 기억은 잔인했다. 

한낮의 무더위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열이 났고, 등 뒤로는 수박만 한 땀방울을 흘려댔었다. 

그리고, 이혼하기 전 여름에 아내와 함께 찾았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여름을 내내 생각나게 했다. 

눈이 파래지도록 빛나던 코발트색 아드리안 해를 끼고 이탈리아 반도를 마주 보고 있는 

크로아티아라는 나라는 해안도시가 특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전 세계 100여 곳이 넘는 도시에 머물렀었지만, 크로아티아만큼 바닷가 마을과 섬들이 아름다운 곳도 없었다. 크로아티아의 여름엔 이미 오전 8시부터 어깨와 등을 따끔거리게 만드는 강한 햇볕이 내리쬤는데, 우윳빛 대리석을 깔아 둔 중세도시 두브로브니크의 거리와, 붉은색 기와지붕들은 마치 거울처럼 태양 빛을 온종일 튕겨내고 있었다. 

     

<청푸름 가득 안고 있는 아드리안 해를 끼고 있는 크로아티아의 해안도시>


아내와 처음으로 크로아티아를 갔던 때는 2005년 여름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두브로브니크란 도시를 들어본 사람도 별로 없던 때였다. 

아내는 우리가 함께 묵었던 두브로브니크 성 바로 옆에 위치한 현지인이 운영하던 민박집에 

여행 중에 읽던 책을 한 권 두고 왔는데, 

2008년 여름에 다시 그곳에 들렀을 때 2년 전에 놔뒀던 책을 찾아내고선 한참을 좋아했었다.      


2008년 여름엔 5살이던 큰 아이도 함께 크로아티아에 있었는데, 

내 생각에는 큰 아이가 아마도 그곳에서 행복해했었던 거 같다. 

하지만 내 기억과 달리 아이에게는 모든 게 낯선 그곳이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같은 공간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각기 다르게 쓰이니까.      

그래서 누구에겐 지우고 싶은 기억이 다른 누구에게는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순간이기도 하다.


새벽이 되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젯밤부터,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했던 2006년도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보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미국 보스턴의 꽁꽁 언 찰스강으로 가게 되는 것만 같아서 

겨울의 중심에 서있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사랑의 기억'에 대한 철학서와도 같은, 이 영화의 메시지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영화 속에는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두 남녀 주인공이 나온다. 

행복했던 또는 가슴 아팠던 그리고 사랑했던 시간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두 주인공이 

잊고 싶었던 혹은 소중히 간직했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서 더 행복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관객들이 다시 보고 싶은 '역대 최고의 멜로 영화'에 뽑히기도 했던 [이터널 선샤인]에서 주인공 남자는 

사랑에 아픔과 행복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든다.>


코로나 상황이 끝나면 아마도 난

크로아티아에 다시 가 볼 것이다. 

그곳에서 15여 년 전에 아내가 놔두고 왔던 책을 찾아볼 것이다. 


그때의 기억 속으로 다시 찾아가 본다는 게 

나에게 또는 아내에게 

행복한 추억이 될지, 아니면 영원히 지우고 싶은 기억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내일 한낮에 다시 여름이 오면

아내와 함께 보냈던 2006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오늘 새벽의 소망을 잊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바람이 분다. 

그리고 오늘 밤에는 가을이 찾아왔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 안에도 밤이 찾아왔다. 여름이 잦아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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