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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Jul 25. 2021

[소나기], [데미안] 그리고 짝사랑

 (시리(SIRI) : 지능형 개인 비서 기능을 수행하는 애플 iOS용 소프트웨어로, 자연어 처리를 기반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추천하거나 웹 검색을 수행한다. 시리(Siri, Speech Interpretation and Recognition Interface) 소프트웨어는, 시리(Siri inc.) 사에서 개발되었는데, 애플이 2010년 4월 28일 시리를 인수하면서 소프트웨어를 소유하게 되었다. )    

      

-나  : ‘시리야,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시리 : ‘잘 판단하고 결정하세요’
-나  : ‘시리야,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시리 :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중요한가요 ‘
-나  : ’ 시리야 너 나빠!‘
-시리 : ’ 저도 제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항상 배우는 자세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     


 21세기 최첨단 인공지능 ’ 시리 ‘도 짝사랑에는 답이 없나 보다. 사내는 짝사랑하는 아픈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 시리 ‘에게 라도 답을 구해보지만, ’ 시리 ‘도 짝사랑에 관한 대답에는 영 실력이 없는지, 딱히 답을 주지 못한다.     


내 인생 처음으로 사랑이자 짝사랑을 했던 첫 번째 여인은, 황순원 선생님의 단편소설 [소나기] 속의 ’ 소녀‘였다. [소나기] 속 소년과 소녀의 아픈 사랑이야기를, 나는 활자가 아닌 우리나라의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KBS 명작 문학관‘ 이란 프로그램을 통해서 먼저 알았다.      


그때까지 해피엔딩 식의 가족 영화에만 익숙해 있던 나는, 영화 속에서 짓궂은 얼굴로 나오는 소년을 보고, 소설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의 우정이, 행복한 결말을 맺게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한여름 소나기처럼 지나갔던 소년과 소녀의 풋사랑은. 소년이 까무룩 잠이 들려는 무렵, 소년의 아버지가, ’ 윤 초시댁 증손녀가 잔망스럽게도, 자기가 죽거든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란 말을 전하며 허망하게 끝나 버리고 만다.      


< 1960년대 초 황순원(黃順元) 선생의 모습. [소나기]는 황순원이 지은 단편소설로, 1953년 5월≪신문학 新文學≫지에 발표되었고, 1956년 중앙문화사에서 간행한 단편집 ≪학鶴≫에 재 수록되었다. 1959년 영국의 ≪인카운터 Encounter≫지의 단편 콩쿠르에 유의상 번역으로 입상되어 게재되기도 하였다 >     


이 영화를 내가 초등학교 5년에 봤는지, 6학년에 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의 가슴 아픈 사랑에, 너무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파서 한동안 소설 속 소녀처럼 끙끙 앓다가, 그만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곤 나도 [소나기] 속 소녀를 닮은, 귀여운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했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나의 첫사랑 ’ 소녀’를 기다려 봤지만, ’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목덜미가 마냥 흰 소녀‘ 를 만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고, 대신 금발의 프랑스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영화 ’ 라붐‘속에서 주인공 역을 한, ’ 소피 마르소‘였다. 나의 모든 짝사랑은 유효기간이 3년인 건지, 이후 3년 정도 소피 마르소를 열렬히 좋아하느라, 동네 다른 여자아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같은 성당에 다녔던 ’ 진이‘나 ’ 경은‘이 같은 인기 여학생들에게, 가끔 눈길이 가기도 했지만, ’ 소피‘를 향한 나의 열정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 소피‘를 향한 나의 멈추지 않을 거 같던 짝사랑이,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들해질 무렵인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게 되었다. 내가 ’ 금사빠‘ 기질이 다분한 건지, 소설 속 주인공 싱클레어가 좋아했던, 베아트리체라는 소녀가 소피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던 건지, 나는 소피를 과감히 버리고 싱클레어의 그녀를 또 사랑하게 되었다.     

 

소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를 열렬히 짝사랑했고, 창가에 서 있던 베아트리체를 몰래 쳐다보며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을 숨겨온 것처럼, 나 역시 책상 위에 놓인, 범우사 세로 판 [데미안]을 볼 때마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설레는 감정이 되살아났고, 나의 소중한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데미안]의 싱클레어보다 내가 베아트리체를 더 사랑했다는 건 확실했는데, 마치 싱클레어보다 내가 먼저 베아트리체를 알아 왔던 것처럼 사랑했기에, 헤르만 헤세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싱클레어를 밀어내고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었을 거라 생각했었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1919년에 발표했는데, 그러고 보면 한 사춘기 소년이 다른 소녀를 사랑하며 느끼는 애타는 마음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딱히 변한 게 없는 거였다.      


< 데미안(독일어 : Demian -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의 1919년 초판의 표지.

‘에밀 싱클레어의 청년시절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처음에는 익명으로 발표하여 에밀 싱클레어 작품으로 알려졌었다. 1919년에 독일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헤르만 헤세가 발표했다. >



고등학교 시절 동안 베아트리체를 가슴에 품고 지내다가, 1988년 고려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중, 고등학교 때는 온통 남학생들만 득시글대는 교실에서 지내다가, 대학에 가면 예쁜 여학생을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하필 과를 경영대학으로 갔더니, 온통 남학생 세상이라서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소나기]의 소녀 같은 여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대학이란 것도, 뭐, 그다지 설레는 로맨스 같은 건 없는 거구나 좌절을 했고, 과 동기 여자 친구들과 ’ 하하 호호‘ 캠퍼스의 사랑을 키우는 건, 오로지 문과대 남학생들의 샘나는 얘기였다.      


그렇게 대학 생활의 첫 6개월을 보낸 1학년 가을, 이대로 사는 건 나의 청춘과 순애보에게 너무 심하게 대하는 거다 싶어, 경영대학에서 눈을 돌려, 학생회관에 있던 문예사랑이라는(예랑)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나의 [소나기] 속 ’ 소녀‘와, [데미안] 속 ’ 베아트리체‘의, 모든 아름다움을 합쳐놓은 것보다, 백만 배 더 아름답고 순결하고 청순하고 영원히 숭배하고만 싶은, ’ 2학년 선배 누나‘가 한 분 계셨다.     


'얼굴은 눈처럼 하얗고, 눈은 수정처럼 맑았고, 한번 손을 움직이면 하프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부드럽고 예쁜 손'을 갖고 있던 선배 누나는, 그 손으로 심지어 기타까지 잘 쳤다. 검정 뿔테 안경을 쓴 모습도 어찌나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던지, 나는 그 누나를 단번에 짝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후배가 감히 선배 누나를 좋아한다는 건, 마치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을 밀고하는 왜놈 앞잡이만큼이나, 주위 사람들의 질타를 받을 천인공노할 일이라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못한 체 대학 시절을 다 보내버리고 말았다.      


그 누나는, 모든 남학생들이 짝사랑하는 여대생들이 다 그렇듯이, 국문과를 다녔다. 누나는 맑고 하얀 얼굴로 웃곤 했는데, 그러면 아침 햇살 같은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와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런 누나의 모습을 하루에 한 번이라도 훔쳐보며 연정을 키우고 싶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내가 동아리에 들어가고 나서, 6개월 정도가 지나자, 선배 누나는 보이지 않았고, 나중에 알아보니 대학원 입학 준비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가끔 시험 기간에 중앙도서관에 가면, 운 좋게 누나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는데, 나는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콩닥거려서, 소가 뒷걸음 질을 치듯, 도서관에서 도망 나오곤 했다. 한 번은 어느 봄날 선배 누나가, 키 크고 멋지게 생긴 훈남 선배와 걸어가는 걸 봤는데, 친구들 얘기로는 그 남자 선배가 ’ 선배 누나‘의 애인이라고 했다.


당시에 나는, 학과 공부와는 영 거리가 멀었고, 학생회 활동만 열심했기 때문에, 선배 누나는 더 멀고 먼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누나는 국문학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전공을 살린 ’ 문화운동‘으로도, 우리 사회에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나는 당장 시급한 우리 사회의 현안을 대학 학생회를 통한 활동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내 마음속 오랜 연인이었던 선배 누나는, 이후에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석, 박사 과정을 마쳤고, 지금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과 영상으로 사회를 더 아름답게 바꾸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일주일 전쯤, 변호사인 대학 동기가,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 동아리 선배들과 같이 부산으로 MT를 갔던 사진을 SNS에 올렸다. 사진 속에서 나는 심각하게 못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얼굴이 하얗던 선배 누나는 부산 바다를 반짝이게 하는 그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역시 문화방송 MBC에서 방송국 PD로 25여 년을 일하면서, ‘Culture Power‘로 우리 사회를 더 이롭게 하길 바랐다. 하지만 간혹 들리는 선배 누나의 소식에는, ’ 향후 100년이 넘어서도, 계속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칠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이 있었고, 내가 만드는 방송 프로그램은, 가볍게 소비되어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상파 방송은 전파와 함께 on air 되는 순간 휘발되어 버리니까.    

 

얼마 전 우연히 알게 된 선배 누나의 페이스북에서, 누나가 오랜 기간 써온, 우리 사회의 문학과 영화, 사회 문제에 대한 글들을 읽을 수 있었다. 글을 읽으며 이미 30여 전의 일이 돼버린, 선배 누나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이제는 선배님의 학문의 깊이와 세상에 울림을 주는 통찰력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어있었다.   

   

시원하게 내리는 '소나기'가 그리워지는,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 속 여름이 깊어간다.

오늘은 황순원의 [소나기]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초등학교 6학년 나의 마음에 늘 함께하던, ’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나무에서, 소녀에게 줄 호두를 따고, 열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집으로 돌아가던 소년‘과,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소년이 만들어준 수숫단 속에서, 이리 들어와 같이 앉아~라고 말하던 소녀‘가 다시 살아날 것 같다. 그리고 싱클레어가 남몰래 사랑하던 베아트리체가 그리워질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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