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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Jul 24. 2021

아픔에 대한 감수성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별을 지나 다시 여름으로-

#1. 아픔의 크기 vs 감수성의 크기     


이안 : 피터팬! 언제까지 그렇게 떠돌아다닐 거야?

 피터팬 : (....................... )
이안 : 그녀와 이별한 지 17개월이 지났잖아. 이젠 그녀를 잊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거야!

피터팬 : 제주도에 내려가서 1년을 지내면, 잊을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제주도의 푸른 하늘과 코발트색의 파란 바다는 오히려 실연의 아픔을 더 크게 자라나게 했어.
이안 :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왔으니, 피터팬 너도 다시 네 현실로 돌아와야 해!

피터팬 : 전설 같은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제주도의 바람과 무더위를 잊게 해 주던 여름날의 소나기는 북한산 아래의 작은 마을에서도 듣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아픔의 크기는 변하지 않고 마찬가지야.
이안 : 소중했던 추억들을 이젠 보내줘야 해, 피터팬! 네버랜드 같은 곳에서 끝도 없이 머물 순 없어.

피터팬 : 아픔을 느끼는 감수성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른 거래. 나는 이곳을 벗어날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아
이안 : 피터팬! 하지만, 네 안에서는 고통을 견뎌내는 인내심의 크기도 함께 자라고 있어!

피터팬 : 아픔의 크기가 줄어든다면 그건 인내심이 아니라 단지 무감각해지는 거야. 시간을 영원으로 늘려서 산다 해도 지나온 기억들이 무감각해진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모든 문학작품 속에서 가장 가슴 아픈 사랑을 한 인물은, [피터팬] 속 '팅커벨'이 아닐까?

요정 팅커벨은 피터팬이 웬디를 좋아하는 걸 알고, 죽을 거처럼 마음 아파하지만, 피터팬은 팅커벨을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버렸으니까>


10여 년 전부터 피터팬의 좌측 목 아래쪽에 자라나고 있던 작은 사마귀(피부 또는 점막에 사람 유두종 바이러스의 감염이 발생하여 표피의 과다한 증식이 초래되는 질환)가 얼굴 전체로 번져가고 있다. 병원에 들르자 의사 선생님은 사마귀가 더 번지기 전에 레이저 시술을 하자고 권하셨다.    

  

긴장되던 시간이 지나고 안면부 마취 후 시술실에 들어가자,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누님, 그리고 피터팬은 2시간여의 사투를 벌였다. 그것도 이틀 연속으로! 안면부 사마귀를 치료하기 위해서 레이저로 100여 군데의 살갗을 태웠는데, 모래알 만한 것도 있었지만, 완두콩보다 큰 사마귀도 제법 있었기 때문에 살갗이 타들어 가는 순간순간마다 신음 소리가 입 밖으로 저절로 튀어나왔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아픔을 손과 다리를 비틀어 대면서 온몸으로 찌릿찌릿 느끼고 있는 내게 의사 선생님 말씀하셨다.     


“인내심과 같은 특정 사람의 성격을 떠나, 아픔에 대한 감수성이랄까? 고통에 반응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 달라요. 그래서 같은 크기의 아픔에도 사람에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괴로울 수 있어요. 그래도 잘 참아냈어요...”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에어컨 없는 여름을 나고 있는 걸 보면, 피터팬은 스스로에 대해서 고통을 잘 견디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잘 참고는 있지만, 무척 아파하고 있다고 하셨다.

- 피터팬 : 내가 갖고 있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의 크기가, 실제 아픔이 갖고 있는 고통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큰 것인지도 모르겠어..

- 이안 : 아픔에 대한 감수성이 큰 만큼, 피터팬 너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도 크니까 더 많은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 수 있었잖아. 인생에서 고통은 아름다움에 대한 슬픈 보상인 거야.     


#2. 석양을 생각한다.     


이즈음 한반도의 석양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여름의 절정,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달가량, 40도를 넘나들던 한낮의 더위도 기운을 잃은 저녁 7시 30분 무렵, 이글거리던 햇볕이 그 기세를 달에게 넘겨주려는 찰나의 순간, 서울의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오렌지 빛깔의 석양은 찬란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게 눈부시다.     


여름의 석양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피터팬이 머물렀던 30여 곳의 다른 나라 300여 개의 다른 도시에서도 아름다웠다. 전 세계에서 해변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와 스플릿, 그리고 마카 스카에서의 석양도 장미처럼 이글거리는 붉은색과 샛노란 오렌지빛 중간의 신비한 빛깔로 하늘을 물들였고, 인도의 고아와 라자스탄, 서유럽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와 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주도 표선면 해수욕장 : 한 여름날의 아름다운 석양빛이 한라산 위의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


과학적으로 여름의 석양이 더 붉고 짙게 서쪽 하늘에 번져가면서 아름다운 색을 뽐낼 수 있는 건 공기 중에 수증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낮의 하늘이 파랗거나 석양이 붉은 것도 빨주노초파남보로 이루어진 햇빛의 입자들 중 대기의 먼지 등에 의해서 더 잘 산란되는 파란색과, 상대적으로 덜 산란되는 붉은 계열의 빛 입자들이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 자신을 더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름의 저녁 하늘엔 다른 계절과 비교해서 수증기가 더 많이 있기 때문에 석양의 태양빛 중 붉은 계통 입자들이 우리 눈에 더 잘 보이게 된다. 파장이 긴 붉은빛의 입자들이 수증기 알갱이와 부딪힐 때 더 잘 산란되기 때문이다.      


빛의 파장에 관한 연구가 과학적으로 입증된 건 근대의 일이니 만큼, 근대 이전의 인류는 한여름의 석양이 더 아름다운 이유에 대해서 한낮 내내 고생한 시간들에 대한 아름다운 보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여름 낮 무더위의 고통이 컸기 때문에, 찬란하게 빛나는 석양을 한여름밤의 꿈같은 낭만으로 초대하는 레드카펫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로 불타던 해가 진 뒤에 달이 떠오르는 시간이 돼도,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기온이 내려가기는커녕 자정에도 30도를 넘나드는 요즘이다. 때문에 한낮이 지나면 편히 잠들 수 있는 선선한 밤이 찾아온다는 기대는 언감생심 하기 어렵다.     

 

그래도 언젠가는 기승을 부리는 열대야도 잦아들 것이고 그 후엔 여름밤의 낭만과 추억을 즐길 수 있는 은하수로 물든 밤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아름답던 시절에 여름밤에 대한 우리들의 감수성은, 한낮의 태양 아래 뜨겁던 모래 해변이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시원한 바람으로 식어가는 선물 같은 보상을 받을 때 한창 커졌었고,  그런 낭만적인 감수성은 시대를 초월해서 늘 우리와 함께 했으니까.

     

#3. Rialto : Monday Morning 5:19      


1997년에 싱글로 발표된 영국 록밴드 리알토의 [Monday Morning 5:19]은 자국 영국에서는 차트 37위에 그친 곡이지만, 한국에서는 유별난 사랑을 받았던 곡이다. 이 노래가 리알토의 1998년 정규 앨범 1집, 1번 트랙에 실려 출시되었을 때,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나라의 웬만한 라디오 채널에서 어김없이 이 노래가 흘러나왔었다.      


당시의 미국 팝 노래들이 한국인에게는 다소 낯선 힙합에 치우쳤다면, 상당수의 영국 모던 록 그룹의 노래들은 한국인의 정서에 더 맞는 슬로 템포의 록 발라드와, 슬프지만 아름다운 멜로디로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본고장 영국보다 한국에서 더 큰 사랑을 받았던 바로 그 노래. 1997년에 싱글로 발매되었다가, 1998년 정규 1집에 수록된 리알토의 [Monday Morning 5:19] >


이 노래의 가사는, '월요일 오전 5시 19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자신의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까 망설이는 내용이다. 만약 그때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두 연인의 사이는 끝인데, 이별을 확인하는 게 마음 아파서 차마 전화를 걸지 못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노래의 화자는 이미 자신의 여자가 떠났다는 것도, 어느 주말 느닷없이 이별이 찾아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월요일 새벽까지 잠 못 이루며 아픈 현실을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름답게 사랑했던 행복한 시간들과 다시는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별의 아픔 사이에 간극이 너무 크다 보니, 도저히 그 슬픔을 감당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혼한 아내는 석양을 특히 사랑했었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다가도 저녁 하늘의 석양이 아름다우면 나와 같이 밖으로 나가서 사진을 찍자며 졸라댔었다. 석양의 붉은빛을 카메라에 담아 보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이 충분히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며 나와의 이별을 원했을 때, 나는 왜 괴로운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내와 함께 지냈던 순간순간들의 아름다움이 그만큼 컸기 때문인 거 같다.     

 

이별 혹은, 이별을 확인하는 일은 아름답던 시간들에 대한 배반으로 읽힌다.

이별은 행복했던 소중한 순간들과의 영원한 작별이다.

여름 저녁의 아름다웠던 찰나의 석양빛이 밤의 어둠 속으로 속절없이 사라져 버리듯,

더 깊고 더 많이 사랑했던 행복한 시간들 때문에,

느닷없이 찾아온 이별은 우리를 더 깊어진 감수성으로 더 많이 아파하게 한다.


#4. 밤을 지나, 다시 여름으로...


아름답고 찬란했던 노을빛과 낭만 속의 한여름밤의 꿈을 뒤로하고,

우린 다시, 긴 여름 한낮의 맹렬한 무더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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