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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Oct 22. 2022

두려움 없이 헤어지기.

-2255만 원에 차를 팔았다-

차를 팔았다.

월세 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름 잘 나가던 MBC 라디오 PD직을 그만두고 3년째 빈둥거렸더니, (정확히 말하면 빈둥거렸다기보다는 몇 가지 유튜브 관련 사업을 했었다. 비록 처참히 실패했지만.) 통장에 잔고가 거의 없어졌다. 사실 거의 없어진 게 아니고, 빚만 3~4천만 원 정도를 안게 되었다.    

  

유튜브 사업이 폭삭 망한 데에는 사연이 있었는데, 올해 5월 친했던 대학 동기가 5억 원 정도의 내 퇴직연금을 다 털어서 가상화폐에 넣으면 10배가 될 거라고 장담했었다. 나는 그 말에 혹해서, 25년 동안 MBC를 다니면서 모았던 적지 않은 퇴직금을 다 가상화폐에 투자했고, 한 달만에 퇴직금이 0원이 되는 걸 생생히 목격했다. 그렇게 되자 유튜브 사업 자본금은 다 날아갔고, 당장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월세도 낼 형편이 안 되었다. 결국 차를 팔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이 없이 헤어지자'며, 김혜수와 한소희가 광고하는 Hey, Dealer에.     


어제 팔았던 차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물론 차라는 게, 매일 출퇴근 시간을 함께 하고 또 가족 주말여행에도 늘 함께 하니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운전자들에게 특별한 사연을 가진 존재 일 수 있다. 게다가 내겐, 2018년에 MBC 라디오에서 부장이 되자 지금은 나와 결별을 선언한 아내가 사준 특별 선물이었으니까 더욱 의미가 있었다.      


차를 팔고 나자 아내와 나 사이에 남아있던 마지막 연결고리마저 없어지게 된 듯했다. 아내와 함께 보냈던 18년의 결혼 생활도, 두 아이들과 함께 주말마다 대중목욕탕에 갔다가 하동관에서 곰탕을 먹던 추억도 모두 다 함께 ‘헤이 딜러’에게 넘겨 버린 것 같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돌아보면 MBC에서 라디오 PD로 근무했던 25년 동안, 첫차였던 현대 '아반떼'로 시작해서, 그랜저, SM5, BMW, 혼다 등 몇 가지 차에 정을 붙였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팔았다. 그럴 때마다 그 모든 차들과 함께 간직해 두었던 소중한 추억들도 사라지는 듯해서 마음이 울적했었다.   

   

[이적의 별밤]을 하던 1997년의 겨울, 프로그램 종료시간 때문에 매일 자정이
한참 지난 시간에 아반떼를 몰고 88 올림픽대로를  건너면서
한강에 비친 서울 야경의 불빛들에 황홀경을 느끼던 순간들.

 

20대 후반의 늦은 첫사랑 그녀와 굽이굽이 국도를 달려 지리산 겨울 여행을 갔던
시절의 추억과 사랑.   

   

30대가 되어 가정을 꾸리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중형차로 차를 바꾸고,
아내와 부모님을 모시고 지방여행을 다니던 시간들.
 
40대에 아이들이 태어나고 카시트를 늘 달고 다니던 10여 년 동안의 시간들과
항상 차 뒷자리에서 들리던 아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50대에 아내와 이혼한 후 3년 동안 제주도와 전라남도 순천, 그리고 서울의 평창동에서 오로지 혼자서만 차를 몰았던 시간들.


아내와 아이들이 잘 살고 있으려나 너무 걱정되고 궁금해서 새벽 2~3시에도 일어나서 여의도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곤 했던 수많은 가을밤의 시간들도 이젠 새로운 소유자가 될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소중했던 또는 가족에게 상처를 줬던, 혹은 혼자만의 방황의 굴속 같았던 차와의 소중했던 순간들을 모두 헤이 딜러에게 보내버렸다.


이젠 차가 없으니, 새벽 마포대교를 달리면서 창문을 크게 열고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가슴속 응어리들을 흩어낼 따위는 없을 것 같았. 대신 다시 뚜벅이가 되었으니,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혹은 교통카드를 챙기지 못해 집까지 걸어가면서, 스쳐가는 거리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하는 아빠들을 부러워하고, 이따금 석양에 비낀 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울 때 오랫동안 멈춰 서서 사진도 찍을 듯하다.      


그래도 [이적의 별밤]에서 [이소라의 음악도시] [김이나의 밤 편지] [강다솜의 새벽이 아름다운 이유]까지 심야 프로그램을 많이 연출했던 나의 새벽 시간에 서울의 밤 공간을 유영하듯 건넜던 그 순간들은 늘 그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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