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작가가 순천시 선암사로 오르는 산마을에 정착을 한 지, 1주일에 넘어갑니다. 오늘은 새벽부터 조계산의 단풍나무들을 촉촉이 적시며 가을비가 내리니, 고) 최헌 선생님의 [가을비 우산 속] 같은 낭만적인 노래를 하루 종일 듣고 싶기도 합니다.
더구나 어제는, 10월의 마지막 밤이기도 했으니 이용 선배님의 [잊혀진 계절]에 이어서, 비 오는 11월 1일 남도의 가을빛으로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최헌 선생의 허스키 목소리가 빛나는,
정다웠던 그 눈길 / 목소리 어딜 갔나 /
아픈 가슴 달래며 / 찾아 헤매이는 /
가을비 우산 속에 / 이슬 맺힌다 /
이런 가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낭만적인 노래를 연달아 듣다 보면, 가을 앓이를 하는 조계산의 아름다운 단풍나무들 만큼이나, '홀아비 앓이'를 하는 이안 작가의 쓸쓸하고 황량한 마음밭에도, 가을을 버텨낼 노랗고 붉은 아름다움이 피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라남도 순천시 조계산의 가을이 노랗고 붉게 깊어 가고 있다 >
오늘은 '인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이안 작가가 서울 MBC 라디오 PD로 명성을 날리며, 라디오 본부 최고의 에이스 피디로 일하던 시절인 2003년 겨울에, 주말마다 [일요기행]이라는 음성 다큐 프로그램의 제작을 위해서 전국 기행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해 2003년 1월에, 김영사에서 [지허 스님의 차]라는 책을 우연히 읽고, 한국 전통 야생차에 대해서 큰 호기심이 생겼어요. 특히 이 책은 당시에 한겨레 신문 여행전문 기자 최성민 기자가 사진을 찍었는데, 최성민 기자의 저서는 제가 평소에 좋아하는 책이기도 해서 더 신뢰가 갔어요.
[지허 스님의 차/ 김영사] 이 책에서는, 지금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제조하는 녹차는, 다 일본의 야부기다 종으로 만든 차인데, 이 차나무는 비료와 농약을 많이 칠 수밖에 없는 개량종이라서, 녹차의 진정한 깊은 맛을 느끼기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었어요.
반면 한국의 전통차 나무는, 일본의 개량 차나무의 뿌리가 횡근(뿌리가 옆으로 퍼져나가서 비료를 계속 넣어줘야 함)으로 자라는 폐단이 있는 반면, 우리 전통차 나무는 직근(뿌리가 땅속 깊숙이 뻗어나간다. 그래서 지상의 차나무 길이보다 3배 이상 긴 뿌리가 땅속으로 자란다)으로 자라기에, 땅속의 영양분을 제대로 흡수한 진정한 찻잎을 생산해 낸다고 지허 스님은 말씀하셨어요.
<사찰 탐방객들에게 직접 차에 대해서 설명하고 차를 만들어 주시는 지허 스님 >
또 지허 스님께서는, 일본의 야부기다 종 나무는 비료를 계속 줘서, 어린 순이 무성히 자라기 때문에 어린 순을 좋아하는 차나무 벌레들이 몰려들고, 이러다 보니 벌레를 죽이기 위해서 농약을 지속적으로 대량 살포할 수밖에 없는 문제점이 있다고 책에서 쓰셨어요. 그래서 야부기다 차는 일본 현지에서도, 차의 품질을 저질화 했다는 비판을 받고, 또 일본 녹자를 오랜 세월 복용한 사람들에게서 수전증의 문제가 생겨, 사회 문제화된 점도 꼼꼼히 지적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백제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넘어와서 이어진 차 문화이 전통이, 태고종 선암사의 선승(禪僧)분들을 통해서 전수되어 왔고, 15살에 출가해서 다각(차를 대중에게 공양하는 일)을 해오신, 지허 스님이 그 명백을 이어오고 계시기 때문에, 다행히 그 전통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 차 나무의 단점은, 일본 야부기다 종이 '화학 비료와 농약의 힘'으로, 한 그루의 나무에서, 30배의 찻잎을 수확할 수 있는 반면, 우리 차나무는 수확량이 적고, 또 맛의 풍미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 9번 이상 덖는(차 잎을 큰 숲에서 볶거나 찌는 것) 과정을 거치는 힘든 과정을 통해서 탄생하기 하기 때문에, 일일이 수작업에 의존하는 등 대량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차(茶) 시장에서도 동서, 태평양 등의 대기업 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태고종의 본산 선암사 스님들에 의해서 전수되어 온, 백제시대부터 우리의 선조들이 마시던 차문화 전통은, 전통 사찰을 통해서만 소수에게 전해지고 있는 게, 지금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지허 스님은, 우리 차나무가 우리 국토에서 아예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선암사 주지로 계실 때는 선암사에서, 또 지금은 금둔사에서 한국의 전통차 나무를 3만 평이 넘는 땅에서 직접 기르고 계세요. 스님은 낮에는 차(茶) 농사를 짓고, 새벽과 밤에는 선불교의 명맥을 이어 명상과 공부를 하세요.
반농 반선(半農半禪)의 생활을 실천하고 계신 거지요. 태고종 종정 지허 스님은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직접 차와 매화나무에 지극 정성을 쏟으시고 “이 또한 수행의 하나”라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중 생활 편하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제자 스님들께 늘 말씀하신 답니다.
<한국 태고종 종정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계심에도, 직접 반농반선을 실천하시는 지허 스님, 스님은 늘 중이 재산에 욕심을 내면 안 된다며, 무욕의 정신을 말씀하세요 >
이안 작가는 지허 스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요. 제가 2002년 5월에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을 했고, 2003년 1월에 지허 스님의 책을 처음 읽고 큰 감명을 받아서, 2003년 2월, 아직 매화가 피기 전인 선암사에 들러 스님을 인터뷰하고, 직접 차를 얻어 마시면서 선암사가 가진 전통문화의 매력에 큰 충격을 받았거든요.
그 후 선암사의 아름다움은 20년 동안 이안 작가의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주도 홀아비의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순천에서, 그것도 선암사가 아닌 금둔사를 우연히 들렀다가, 밀짚모자를 쓰고 길에서 산책을 하시는 할아버지를 뵈었어요.
이안 작가는 갑자기 가슴속 슬픔이 솟구쳐서,
“제가 아내와 가족과 헤어진 홀아비인데요, 그래서 조계산과 선암사가 아름다운 순천에서 살려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고, 할아버지는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런데 말씀 중에 자세히 얼굴을 뵈니까, 안면이 있어서,
혹시 스님이십니까? 혹시 제가 20년 전 인터뷰를 했던 바로 그 차 스님 이십니까?
라고 여쭤봤는데,
그 동네 할아버지가 바로, 선암사 주지에 이어 태고종 종정이 되신 지허 스님이셨어요.
이안 작가가 20년 전에 문화적으로 큰 감동을 받고, 순천에 머물러야겠다는 인연을 맺어주신 스님을, 우연히 금둔사 앞 돌계단에서 다시 뵈온 것이지요. 스님은 저를 승방으로 부르셨고,
“지금까지는 힘들고 방황했겠지만, 앞으로가 중요하네. 특히 오십이란 나이는 아주 중요하네. 그러니 지금부터 목표를 갖고 정진을 하면, 반드시 가족이 다시 돌아올 것이네”
라는 지혜의 말씀도 전해주셨어요.
스님과 토요일 오후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스님이 직접 만드신 금둔사의 전통차를 마시면서, 많은 깨우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안 작가는 선암사나 금둔사 어딘가에서, 살 곳을 정하고 살아야 할 인연이라는, 확신도 하게 되었습니다.
<순천시 금전사 기슭에서 내려다본 금둔사. 최근 사 터에서 창건 당시 건물지 지층에 대한 발굴을 통해, 지금까지 4동의 건물지를 확인했고, 초석·기단·연화문 숫막새·주름문늬병 등의 유물을 발굴했다. 또 발굴 유물을 토대로 금둔사는 9세기경 창건된 사찰임을 확인했다. >
참고로 지허 스님은 우리 전통 사찰문화에 대한 학식과, 애정이 지대하셔서, 선암사를 옛 모습을 간직한 지금의 모습으로 중창하는 데 큰 기여를 하셨고, 또 선암사에서 그리 멀리 않은 금둔사의 터를 우연히 찾아내시고, 지금 중창 중이세요. 스님은 다 쓰러져서 흩어져 있던 불상과 석탑의 조각을 찾아내어, 다시 금둔사 3층 석탑과 (보물 945호), 석불비상(보물 946호)을 세우셨고, 문화재청은 이 유물이 9세기 통일신라 시기의 유물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보물로 지정했어요
지허 스님은 1979년에, 큰 스님들께 드릴 수박을 따러 금전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불상의 조각을 찾아냈고, 이후 이곳이 기록에 나온, 구산선문이 하나인 선종 가람 [금둔사]라는 걸 밝혀내시고, 지금까지 40년의 세월 동안 금둔사 복원 및 중창에 힘쓰고 계신, 우리 문화재의 진정한 지킴이라고 할 수 있는 정말 존경받아야 할 대단한 분이시지요.
<지허 스님의 각고의 노력으로 다시 세워진 금전사 3층 석탑. 보물 945호 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전체 높이는 4m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는 9세기경의 작품이다. 특히 1층탑신 좌우면에 불상을 향하여 다과(茶菓)를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 양각(陽刻)되어 있어, 특이한 예(例)로 주목받고 있따. 또한 각부의 비례(比例)도 좋고 조각수법이 세련된 수준급의 석탑이다. >
이안 작가가 이렇게 대단하신 금둔사 주지 스님과 인연을 맺었다는 게,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해요. 소설가 공지영 작가는 [먼바다]라는 소설을 쓰고, 소설 속 배경이 되기도 했던 순천시 금둔사의 지허 스님을 뵈러, 두 번이나 찾아왔지만, 못 뵙고 스님 방에 책만 놓고 가기도 했대요.
이안 작가가, 태고종 종정 지허 스님한테 조르고 졸라서, 금둔사에 방 한 칸만 달라고 해볼까요?
우리 전통차 재배와 차 만드는 법도 배우고 스님께 불법도 배워 볼까요? 스님이 받아주실까요?
구독자 분들 의견은 어떠세요?
놀라운 흥분 속에서, 비 온 뒤에 더 아름다운 조계산의 가을은 깊어만 갑니다.
<아직은 중창 중이기 때문에, 소탈한 모습이 군데군데 보여서 더 정겨운, 순천시 금둔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