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으로 지쳐 쓰러진 나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30대 중반까지 결혼 생각 없이 살다가 입사 동기로 4년간 알고 지낸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사귄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평소 건강하다고 생각했기에 임신은 언제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우리는 주말마다 여행을 즐기며 자연스러운 하늘의 축복을 기다렸다.
결혼하고 몇 개월 후 남편이 바쁜 인사부서로 발령이 났고 나 역시 매일 반복되는 격무로 스트레스가 극심해지자 아이 소식 없이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30대 후반을 바라보게 되었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결국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본격적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임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친정이 부산이라 부산의 큰 병원에 가기 위해 편도 세 시간 거리를 오가며 수시로 산부인과에 가서 배란일을 받고, 약과 주사를 처방받았지만 임신은 쉽지 않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검사를 해봤지만 둘 다 정상이라고 했기에 임신이 곧 될 거라는 믿음으로 자연임신에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그러다 반년이 또 지나고, 결국 부산에서 유명한 전문 난임 병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초반 정밀검사에서 둘 다 정상이라고 하여 이번에는 진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인공수정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두 번의 시술도 역시나 실패하였고 점점 시험관밖에는 답이 없겠다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난임 병원에서는 난자를 미리 채취하여 수정후 냉동시켰다가 시술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양질의 난자를 한꺼번에 많이 채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여러개의 호르몬 주사를 매일매일 수차례 자가로 맞아야 했다.
그 과정을 겪어본 난임부부들은 다 알겠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임신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게다가 내가 직장을 쉬어서 남편의 외벌이 수입만으로 병원비가 꽤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호르몬 주사와 약의 투입으로 나의 몸은 점점 망가지고 자주 아팠다.
어떤 날에는 약과 주사가 독해서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계속 구토를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시술, 채취 등의 전후에는 항생제를 달고 살아야 했기에 위장은 늘 쓰리고 아팠다. 그렇게 모든 약물을 동원해서 어렵게 냉동 수정란을 얻었는데 이식하기 몇 달 전 갑자기 호르몬의 영향으로 자궁에 근종이 생겼다고 하였다.
너무 속상했지만 나의 감정을 다스릴 마음의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근종 제거술을 먼저 한 후 이식을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나는 기계적으로 동의했지만 사실 몸도 마음도 매우 지쳤다.
병원에서는 나의 몸상태와 생리주기에 따라 제거술을 바로 하지 않고 근종 크기가 자라지 않도록 또 두 달간 호르몬 약과 주사를 처방해주었다. 당시 사용했던 약은 임상실험 중이라 무슨 사용 동의서(?)에 사인을 하기도 하였다. 그 약들은 자궁을 폐경 상태와 유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는데 덕분에(?) 나는 폐경기 여인의 호르몬 상태처럼 우울한 마음과 지치는 체력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두 달 후 근종 제거술을 위해 전신마취를 했는데, 마취가 끝난 후 입원을 하려고 하니 막상 자세히 보니 근종이 아니라 용종이니 그냥 퇴원하라고 하였다.
환자가 약자이고 계속 의사 선생님을 믿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 별다른 말은 못 했지만 사실 많이 황당하였다. 용종이었으면 애초에 이렇게 장기간 약물투여도 안 했을 것이고 시술 또한 진작에 간단히 하고 끝났을 텐데 속상하고 어의가 없었다. 그러나 병원의 높은 인지도만큼이나 옮길만한 다른 병원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으로 겨우 붙잡고 있는 내 마음이 흔들릴까 봐 그냥 의사의 말을 전적으로 따랐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드디어 첫 시험관 시술을 하게 되었다.
친한 친구는 일반 산부인과에서 시험관 시술을 엄청 간단하게 했었기에 (게다가 그녀는 진짜 자궁 근종이 있었고 수술도 수월하게 했었다.) 나도 처음에는 심적부담이 없었지만 오히려 이곳은 난임 전문병원이라 그런지 준비과정에서부터 사전에 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고 기간도 계속 길어져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
그즈음 이미 나는 가족 외에 대부분의 친구,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지냈다.
몸도 아프고 마음은 매일 땅속으로 꺼지는 듯 우울하였기에 누군가와 웃으며 대화하는 것이 힘들었다.
원래도 울음이 많았지만 더욱 자주 울고 지냈고 일상에 슬픔이 가득하였다.
나의 간절했던 바람과 달리 첫 시험관 시술은 실패였다.
착상을 하고 1차 피검을 하기 며칠 전부터 피가 약간 보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조금 묻어 나와서 괜찮겠지 라며 스스로 되뇌었다. 그러나 피의 양이 점차 많아졌고 불안감에 병원에 전화를 했지만 안정을 취하고 며칠 후 피검사 날 오라고 해서 며칠을 조바심 내다가 3일 후 병원에서 피검사를 하였는데 아직 호르몬상 수치로는 임신으로 나왔다. 그러나 처방해준 약과 임신유지에 도움을 주는 호르몬 주사에도 엄청난 하혈을 하며 결국 유산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자궁이 이런저런 시술들로 힘든 상태라서 수정란을 유지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양질의 난자를 채취하기 위해 그동안 수없이 약물을 복용하고 주사를 맞아서 32개나 채취했는데(참고로 보통의 여자들은 한 달에 한 개씩 난자가 나온다.) 그 소중한 난자들이 나중에 수정과정에서 대부분 죽고 4개만 겨우 수정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그 중 첫 시험관에 이식한 2개가 실패하여 사라졌다.
병원에서 몇 차례 피검사 후 완전한 유산을 인정하며 집으로 오는 길에 정말 펑펑 울었다.
남편도 아이를 무척 원했었지만 매일 내가 너무 힘들어하고 우니까 자기는 괜찮다고 만약 아기가 안 생기면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자며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게 진심이 아닌 지 충분히 알았지만, 너무 힘들었던 그 순간에는 그 말이 고마웠다.
나는 어느새 39살이 되고 나에게 남은 수정란은 2개뿐이었다. 물론 훨씬 더 많은 시험관 시술로 나보다 고생하신 분도 많이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시술 준비과정에서 너무 힘들었다. 정말 간절하게 원했던 아기였지만 만약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다시는 그 과정을 반복해서 겪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스스로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39살의 가을날. 드디어 마지막 2개의 수정란을 이식하게 되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너무 불안했고 무서웠지만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시술 후 이번에는 친정에 가서 진짜 거의 누워만 지냈다. 70살이 다 되어가는 우리 엄마는 그렇게 나이 든 딸의 첫 임신의 성공을 위하여 감사하게도 나의 모든 수발을 들어주셨다.
덕분에 무사히 1,2차 피검사까지 통과하였고 초음파를 확인하며 어느새 임신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축하합니다. 임신 성공이네요." 라고 의사 선생님이 직접 말해주던 그날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내 인생을 통틀어 손꼽히는 벅찬 감동의 순간이었다.
비록 고대하던 임신을 하고 난 후 예민해져서 남편과 싸우는 날도 가끔 있었지만 그래도 태교에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10개월 동안 소중히 품어낸 생명을 드디어 마흔의 여름날 출산하였다.
아마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확률이 99% 인 출산이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적 없이 임신을 하였고, 이미 노화가 한창 진행되는 마흔에 아이를 낳아선지 외형상으로는 임신 전보다 약간 통통해진 모양새이지만 온몸이 성한 데가 없다.
관절 마디마다 쑤시고, 치아도 시리고, 찬바람만 불어도 오한이 느껴지고, 뼈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느낌이 든다. 피부도 늘 적당한 유분으로 주름도 없고 오히려 기름종이를 늘 휴대하고 다녔었는데 이제는 극심하게 건조하고 메마른 느낌이며 주름까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하다.
꽃다운 마흔...
아니 겉모습은 마치 모든 생기를 다 빼앗긴 시든 꽃처럼 푸석하고 힘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딸의 친구 엄마들에 비해 나이가 7~10살이나 많은 엄마지만 우리 딸은 나보고 꽃처럼 이쁘다고 말한다.
우리 딸에게만은 꽃다운 엄마이고 싶다. 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