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7년째 나는 남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이 사람은 요리를 못 한다. 손 맛이 없다고나 할까?
그래서 처음 몇 번 먹어보고 그 뒤로 거의 내가 요리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나는 요리를 해서 그와 함께 먹는 시간을 좋아한다. 사실 그 누구도 요리를 강요하진 않았다. 남자친구도 굳이 힘들게 집밥을 만들어서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그냥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화가 나는 순간이 있다.
밥 차리는 것에 동참하지 않을 때. 바로바로 밥을 먹지 않을 때.
대부분의 날은 요리가 다 끝나가면 그가 와서 음식을 옮기고 수저를 놓는다.
그렇지만 요즘 하는 일이 바쁜 탓인지 시도 때도 없이 업무를 보느라 밥을 차려도 국이 다 식을 때까지 먹지 못 한다.
그러면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어떤 날은 그 순간에 과몰입해서 뾰족한 말을 하기도 하고 그냥 참고 넘기는 날도 많지만 어제는 다행히 식사 준비를 하며 알아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그 순간을 지켜볼 수 있었다. 화가 발견되자마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화가 나는구나. 잠깐 기다려. 밥 먹고 나랑 이야기하자.’
나의 내면 아이에게 말한 것이었다. 우리의 식사 시간은 평화로웠고 즐거웠다. 그를 무한히 애정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요즘 밖에서 잘 먹고 다니는지 안 그래도 통통했던 얼굴에 더 살이 올라서 귀엽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나 혼자 식사 준비를 하는 게 분해서? 국이 다 식는 게 속상해서?
표면적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아마 예전 같으면 나는 남자친구에게 이런 식으로 화를 냈을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렇게 국이 다 식어서 맛도 없어졌잖아! 그리고 내가 땀 흘리면서 주방에서 이러고 있으면 빨리빨리 와서 거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말이 진심일까? 난 과연 이렇게 남자친구에게 화를 냈을 때 속이 시원할까? 아니다. 분명히 저 문장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어린아이가 있다. 아이들은 사실 본심은 따로 있으면서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하고는 한다. 잠투정을 할 때 보면 그냥 졸려서 그런 거면서 오만가지 이유로 짜증을 낸다. 엄마가 하루 종일 놀아주지 않아 속상한 거면서 괜히 밥투정을 하고 동생을 때리고 괴롭히면서 자신의 진짜 마음을 감춘다.
내가 바로 화를 내지 않은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스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우리를 화나게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화는 원래부터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화를 알 수 있게 도와줬을 뿐입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는 천 가지, 만 가지도 넘겠지만 사실 그 화를 내는 아이와 대화를 해보면 결론은 사랑받고 싶고, 버림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세상이 너무 두려워서 그런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더운 주방에서 땀 흘린 몸을 씻기 위해 샤워를 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내면아이와 대화를 시작했다. 내 마음의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를 때는 답을 알 때까지 “왜? “라고 물으면 된다.
아가야, 오늘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걔가 바로바로 안 오잖아. 열받게.
왜 바로바로 안 오면 화가 나는 거야?
국도 다 식고, 나 혼자 밥 먹게 하니까 화가 나지.
그게 왜 화가 나는 거야?
내가 요리해주는 거를 당연시 여기는 것 같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왜 화가 나는 거야?
나를 무시하는 거잖아.
나를 무시하는 거잖아라고 대답했을 때 무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찌르르하면서 슬픈 감정과 기억들이 밀려왔다.
아빠는 엄마를 늘 무시했다. 그리고 엄마는 나를 무시했다. 엄마는 나에게 매일같이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멍청한 년이라며 구박했다. 어쩔 땐 엄마가 때린 꿀밤에 코피가 나기도 했다. 엄마의 언어폭력과 신체 폭력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멈췄지만 이미 내 마음은 상할 때로 상한 상태였다.
세뇌당한 탓인지 나는 스스로도 무능하고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소심했고 극내향적이었고 친구 사귀는 법을 몰랐다. 그렇게 눈치 보며 이리저리 놀이터를 방황하고 있으면 친구들이 말을 걸어왔다. 나의 어리숙한 모습에 친구들은 얘는 깍두기를 시켜주자며 놀이에 껴주곤 했다. 그때부터 나는 일부러 더 어리숙한 척을 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상처받았으면서 안 받은 척 예민하면서 털털한 척하면 친구들이 깍두기를 시켜서라도 보호해 주고 놀아줬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정말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는지 자주 무시하는 말을 하고는 했는데 사실 무시받는 건 집에서도 일상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그런 기억들을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눈물이 펑펑 나왔다. 내 안에 어린아이를 내 입에 올려 말하게 했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너네랑 놀려고 그랬어. 엄마는 내가 정말 상처 안 받은 지 알았어? 왜 아무도 내가 상처받는지 몰라 왜? 나 정말 너무 외롭고 슬펐어. 나 무시당하기 싫었어. 혼자될까 봐 무서웠어. “
입에 올리면서 느낀 것은 생각보다 내 상처가 깊다는 것이었다. 그저 어린 시절 미숙한 나의 행동이었고 엄마도 친구들도 다 어렸기에 그랬다고 애써 나 자신을 타이르며 잊고 있었던 기억. 나조차도 내가 이렇게까지 상처받았는지 몰랐다. 이 아이와는 몇 차례 대화를 더 나눠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번의 대화로 끝나기엔 그 상처가 깊었다.
울면서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고 있으니 뭔가 씻겨 내려가는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정도 감정이 해소되었을 때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너무 늦게 너한테 찾아왔지. 정말 미안해. 네 맘을 몰랐던 나를 용서해 줘. 나에게 너의 슬프고 힘들었던 상처를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우주보다도 더 귀한 존재야. 우주보다 더 크게 너를 사랑해.”
샤워를 끝마치고 나와서 기력이 다한 나는 한 시간 정도 알아차림 명상을 하며 반수면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 다시 즐겁게 이야기했다.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얼마나 즐겁게 이야기하는지 나도 하루 중에 그 이야기 듣는 시간이 기다려진다. 그에 대해 느꼈던 분노는 사라지고 그저 즐겁고 유쾌한 우리가 있었다.
내 건강한 몸으로 그에게 요리를 만들어 줄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손가락 하나라도 불편했으면 요리는커녕 씻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혼자 밥 먹는 것은 그렇게 화가 나는 일은 아니었다. 난 원래도 그가 출근하고 나서 혼자 밥 먹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가 다 식은 국을 먹는 것도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화가 나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요리를 하는 행위를 좋아했고 하다 보면 양이 많아져서 먹어주는 사람까지 있으면 더 좋은 거였다. 그가 식은 국을 먹든 갑자기 입맛이 사라져서 내일 먹든 크게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내면 아이와 이야기를 하고 나면 이렇게 그 사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피해받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집엔 더 이상 피해자와 가해자는 없었다.
내 안에 울고 있는 어린아이와 만나게 해 줬으니 오늘은 그가 좋아하는 귀청소도 해주고 같이 맛있는 것을 시켜 먹어야겠다.
이 글을 보신 분들께 올리는 기도문
저와 글로써, 영상으로써 함께 공명하는 그대여,
제가, 제 부모가, 제 피붙이가, 제 조상이
당신, 당신의 가족, 당신의 피붙이, 당신의 조상에게
우주가 생겨난 태초부터 지금까지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상처를 준 일이 있다면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모든 고통의 기억과 불안들이 순결한 빛으로 변형되길 기도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