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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 기술 굴기의 미래

3. 중국 반도체 굴기의 미래는 밝지 않다.

by 권석준 Seok Joon Kwon

3.1. 중국 반도체 굴기의 불안정성

앞서 이 시리즈의 1, 2편에서 살펴보았듯, 그리고 업계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반도체 산업은 사실상 주기가 엄청나게 빠른 장치 산업이라, 현금의 회전율이 높아야만 겨우겨우 유지가 된다. 반도체 기술의 한 세대는 무척 짧아서 3-5년 정도가 한계이고, 그 세대의 기술을 감당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각종 장비는 다음 세대로 승계되어 재활용이 거의 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사실상 그대로 매몰비용이 되는 것인데, 그것이 또 수 조-수십 조 단위이다. 비즈니스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한 세대의 기간 동안 그 매몰비용보다 적어도 두 배는 벌어야, 그다음 세대의 투자금과 그 다다음 세대의 R&D 비용이 나오는 구조이다. 즉, 그 순환 구조가 감당 안 되는 업체들은 진작에 나가떨어지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해당 산업에서의 현금 회전율이 매우 안 좋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넘게 이 분야에 구조의 자금 회전 효율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라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투자를 감행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장 규모의 거대함 (2020년 기준, 2,600억 달러 이상)에 대한 장밋빛 전망에 기인하여 미래를 저당 잡힌 것도 있고, 중국 정부가 추구하는 자국 반도체 산업의 자급률 제고 (2020년 기준, 15.6%)도 있겠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거대 은행들이 반도체 업체들에 대해 대규모 투자를 해 줬기 때문이고, 중국 정부의 묵인 하에 각종 2차 시장에서마저 계속 돈을 조달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90년대 개혁개방 정책 이후, 중국이 두 자릿수 경제 성장률을 견지해 오던 시절에는 나름 잘 통하는 방식이었는데, 201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한 자릿수 성장률로 내려오게 되니, 조금씩 내부에서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물론 두 자릿수 경제성장률이 수십 년 유지되리라 예상한 전문가들은 아무도 없었지만, 생각보다 불이 빨리 식었다는 인상은 많은 이들에게 불안감을 야기했다. 한 자릿수, 나아가 5% 미만의 경제 성장률 기조에서는 이러한 한 분야에 대한 올인은 큰 모험이고 위험이다. 이미 중국은 중앙 정부 및 지방 정부가 지난 20년 넘게, 경쟁적으로 중국 각지의 부동산 개발에 열을 올려서 거품이 가득 차오르는 누란지위의 상황인데, 거기에다 그 수혜의 범위가 상당히 제한적인 반도체 산업에 국가의 자원을 올인하다시피 하는 것은 이제는 나라 전체를 백척간두로 몰고 가는 모양새가 된다.


3.2. 중국의 대미 반도체 경쟁은 소련의 대미 군비경쟁 전철을 밟는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 올인 전략은 과거 20세기 중후반 냉전 시절, 소련이 미국과 무한 군비 경쟁을 하던 것과 오버랩된다. 공산주의 진영의 맹주로서 구 소련의 국력과 자원, 국토, 우수한 인적 자원과 바르샤바 조약기구 하의 동유럽 국가들, 쿠바, 몽골, 북한 등에 대한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가히 세계 이인자 이상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몇 발 앞선 제조업 생산력과 지식 창출 능력이 뒷받침되는 미국에 대항하여, 그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는 생산 방식에 기대어 무리한 군비 경쟁을 벌였으니, 소련의 다른 공업 분야, 특히 의약, 경공업, 화학, 소비재 관련 공업들의 기반은 점점 무너져 갔다. 물론 군비 경쟁에 대한 올인이 없었더라도, 공산주의 시스템 상, 제조업 분야의 경쟁력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채택한 나라에 대해 과연 얼마나 오래 유지되었을지는 회의적이다. 다만, 그렇지 않아도 어차피 지게 되어 있는 구조의 경쟁을 무리한 군비경쟁이 가속시킨 모양새가 된 셈이다.


중국이 과거 냉전 시절 소련의 몰락 코스를 따라가고 있다고는 현재로서는 단언할 수 없지만, 결국 그러한 코스로 진입하는 것은 블랙홀 주변의 별이 블랙홀로 언젠가는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이 시간문제로 보인다. 점점 악화되는 재정 수지를 통계 조작으로 감추면서까지 한 분야에 대한 올인을 한다면, 그 분야가 무사히 성공했을 시에는 위기가 타개될 가능성이 없지 않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밀린 빚을 찾아 갑자기 빚쟁이 군단이 몰려드는 것 같은 형국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 투자를 일종의 기술 생태계 자립, 기술 독립이라는 기치로 설정하여, ‘중국제조2025 (中国制造2025)’의 기치 아래, 막대한 규모의 한 정부 주도 투자를 감행하고 있는데, 결국 지금 상태로만 보면, 점점 밑 빠진 독의 물 붓기 형국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과감하게 올인하고 있는 투자의 결과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현재로서는 요행에 가깝다. 물론 중국 정부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21세기는 데이터의 생산과 처리, 그리고 그것을 고급 정보로 누가 더 잘, 그리고 빨리, 그리고 더 저렴하게 만드느냐 지식 경제 싸움인데,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기술이 바로 반도체와 IT 서비스 산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미국이 주도하는 이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 바야흐로 명실상부한 G2의 포지션으로 올라온 중국 입장에서는 더 격차가 벌어지기 전에 국가 주도의 전략 하에, 이 분야에 투자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3. 기술 굴기에 집착한 중국의 실책

그런데 여기서 중국 정부가 무리수를 둔 것이 있다. 정석대로 기술을 개발하고 내부 인력을 키우고 기초원천 R&D에 투자하는 모양새를 견지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중국에 진출한 합자 회사들의 IP를 침탈하고, 해외 기업들을 무리하게 인수 합병하고, 외국 기업들에 대한 당 주도의 해킹과 기술 유출, 산업 스파이짓을 무분별하게 벌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다른 나라들도 감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기술 유출이니, 서로 눈감아 줄 수 있는 선이 있겠지만, 중국은 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기 때문에, 결국 2인자를 두고 보고 있던 미국의 인내심의 끈이 끊어진 결과를 초래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눈치껏 내부에서 숨죽이고 도광양회를 했어야 했는데, 너무 일찍 대국굴기를 표면에 드러내 버린 셈이 되었다.


과거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이 ‘도광양회 (韜光養晦)’를 후세에 대해 훈요 '5조' (冷靜觀察, 穩住刻步, 沈着應付, 韜光養晦, 有所作爲)의 하나로서 외친 것은 이러한 세계 구도의 변화를 천리안처럼 내다보고 했던 외침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넓게 보면 덩샤오핑은 필히 수 세대 안으로 중국과 미국이 결국 치열한 패권 다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은 내다보았을 것이다. 21세기가 정보의 싸움, 기술의 싸움으로 개편되는 패권 다툼의 시기라는 것까지는 알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결국 두 패권 국가의 다툼은 그 나라의 실력과 기초 체력에 달려 있음은 만고불변의 역사적 교훈이니, 덩샤오핑이 후세를 두고 도광양회를 하라고 했던 것은, 그 ‘광’이 중국의 정상적인 기초 체력 배양, 그 ‘회’가 정상적인 실력 배양을 하라는 의도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중국의 경제 성장률은 중국인들 스스로도 제어가 안 될 정도로 너무 높아졌고, 산이 있으면 골이 있는 것처럼, 두 자릿수 경제 성장률이 한 자릿수 경제 성장률로 떨어지는 시점부터 이에 대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덩샤오핑이 이야기한 ‘광 (光)’을 제대로 ‘도 (韜)’하지 못했고, ‘회 (晦)’를 제대로 ‘양 (養)’하지 못한 셈이라 볼 수 있다. 뻔히 보이는 길이 있는데, 그것을 마다하고 돌아가는 길을 택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중국 정부도 뻔히 보이는 기술 격차 해소의 길이 있는데, 그것을 마다하고 정상적인 기술 경쟁의 길을 택하지 않은 것이, 결국 그들에게 현시점의 고난의 행군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물론 중국이 이대로 미국의 기술 제재 조치에 굴복하고 백기를 들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21세기 중국 정부의 자신감은 ‘주동 작위 (主動作爲)’라는 기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국으로서 할 일을 대국의 자격으로 하겠다는 입장을 여실히 드러낸 셈이다. 실제로 여전히 중국 정부는 자국 경제의 기본 체력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고, 여차하면 자국만으로도 어쨌든 자력갱생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스스로 ‘대국’이라는 표현을,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공식석상에서 쓰기를 마다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계의 문화와 기술, 생활수준과 표준을 맛본 중국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만큼 폐쇄된 환경을 호락호락 반기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거의 70년 넘게 중국의 일당 독재가 ‘무사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반기는 체제 경쟁에서 오는 내부 결속, 중반기는 내부의 불만에 대한 강제 무력 진압, 후반기는 경제 성장으로 인민에게 빵을 던져 주는 전략이 나름 먹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2020년대의 시점을 살고 있는, 유년기부터 중국의 경제 성장을 온몸으로 체감해 온, 중국의 2030 세대에게는 지금까지의 일당독재 통치 방식이 쉽사리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생기고 있다. 이미 많은 중국인들이 음으로 양으로 해외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고, 많은 것들이 세계적인 수준에서 표준화되고 있으며,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돌파하고 있고, 상하이, 베이징, 선전 같은 중국의 대도시는 뉴욕이나 런던, 도쿄 같은 세계 다른 대도시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아니 오히려 더 선진적으로 사실상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도체 산업에 대한 10, 20년 지속되는 무리한 투자가 실패의 국면으로 접어드는 모양새가 연출될 경우, 그간 눌려 있던 인민들의 각종 불만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특히 지속적인 경제 성장률 저하 추세로 인해 그간 거품이 잔뜩 껴 있던 생활수준의 저하가 야기되는 일이라고 생긴다면 젊은 세대의 불만이 폭증하게 될 가능성은 상존한다. 이는 중국 공산당 정부가 가장 싫어하고 가장 두려워하는 1989년 천안문 사태 같은 정치적 소요와 불안, 나아가 그렇지 않아도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불만이 누적되고 있는 신장 위구르, 티베트 등의 자치구의 소요로 이어질 수 있으니 공산당 정부는 이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더더욱 반도체 산업 발 경제 불안이 나오지 않게 갖은 수를 쓸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은 회계 부정일 수도 있고, 통계 조작일 수도 있고, 기술 스펙 속이기일 수도 있고, 자국 순수 생산 IT 산업에 대한 포장 눈속임일 수도 있고, 정부가 주도하는 무리한 관치형 대기업 구조조정일 수도 있겠다. 방식은 다양하지만, 어쨌든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되고 있는 반도체 경제 굴기는 반드시 실패하면 안 되는 대마불사의 아이템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중국이 미국과의 끝없는 군비경쟁, 특히 핵무기 경쟁으로 인해 나라가 피폐해져 갔던 소련의 코스로의 비가역적인 진입을 하게 된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결국 기술 격차 줄이기에 실패하고, 어마어마한 매몰 비용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게 된 자국의 반도체 산업이 될 것이라 조심스럽게 예견한다.


3.4. 중국 반도체 굴기의 막다른 골목에 돌파구는 있는가?

물론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고, 미국 주도의 기술 표준에서 완전히 그 궤가 벗어난 새로운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중국이 개발하여 기술을 주도할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그들이 자랑하는 양자통신 기술, 양자컴퓨터 기술, 나아가 아예 다른 방식, 예를 들어 나노쉬트 (nanosheet), 나노와이어 (nanowire), 나노튜브 (nanotube) 같은 나노 재료 기반의 전계효과 트랜지스터 (field-effect transitor, FET)나 GAA (gate all-around) FET, QCA (quantum cellular automata) 같은 신개념 로직 아키텍처나 메모리 기술, 스핀트로닉스 (spintronics) 차세대 반도체 기술 등에서 기술적인 돌파구가 갑자기 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지만 필자의 의견으로는 이러한 기술적 돌파구는 창의적인 문화가 있어야만 나오는 것이고, 정부 주도로는 선형으로 예상되는 궤도에서 갑자기 돌파구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술의 표준을 당이 정하고 기술의 범위를 정부가 정하는 시스템에서는 급작스러운 돌파구가 설사 출현한다고 해도 그것이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전까지 무사히 성장할 수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20년대, 나아가 2030년대의 중국이 과연 앞으로 어떻게 미국과 기술 경쟁을 이어 나갈 것인지, 많은 전문가들이 앞다퉈 전망을 내고 있지만, 그 전선 한가운데 있는 반도체 기술 전쟁, 차세대 통신 기술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는 통일된 의견이 없다. 그만큼 이 분야에는 불확실한 요소가 많고, 일부는 정치적인 요소에 속하는 것이라, 중장기 전망을 내어 놓기 어렵다. 필자 역시 감히 어떤 전망을 확실히 내어 놓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깝고 먼 역사의 교훈을 늘 참고할 수는 있다. 특히 냉전 시대의 소련의 군사력에 대한 올인은 가장 직접적인 교훈이 될 수 있다. 아마 중국 공산당 정부도 역사를 많이 공부했으니 소련의 몰락 케이스를 많이 공부했을 것이고, 이를 참고하여 자체적으로 위험 회피 전략을 공들여 세워 놨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 위험 회피 전략은 미국이 예상하고 있는 범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고, 미국에 아직 스마트한 전략가들이 충분히 많이 남아 있다면, 오히려 지금의 반도체 경쟁, 전쟁은 그들이 바라는 (혹은 설계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국이 언제까지 천년만년 지구 상 유일의 G1 국가로 남아 있을지 의문이지만 (이미 조금씩 그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증상을 보이지만),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가는 것처럼, 적어도 앞으로 1, 2 세대는 계속 이러한 헤게모니가 유지될 것이라 본다. 이런 입장에서는 중국의 전략가들이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반도체 대마를 죽여야 할 수도 있다는 옵션을 내놓는 수순까지 가야 중국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본다. 반대로 미국 입장에서는 흔들리던 G1의 지위를 다시 공고히 하고 헤게모니를 더 굳세게 지키기 위해서라도 G2 중국을 희생양 삼아 반도체 기술 전쟁에서 더 철저한 중국 견제와 더 실리적인 자국 이익 지키기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3.5. 쉽게 항복을 선언하지 않을 중국의 반도체 굴기

앞선 세 편의 글에서 살펴보았듯, 2020년대의 중국은 이제 미국이 주도하는 대 중국 반도체 기술 전쟁에서 굉장히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다. 제재가 지속되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자력갱생해야 하는 처지가 되지만, 이는 기술적으로 절대 중국에게 유리한 국면이 아니다. 상황은 중국에게, 더 정확히는 중국 공산당 정부에게 녹록지 않다. 그러나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각국의 기술 경쟁은 표면적으로는 첨단 기술의 쟁패로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뿌리 단계부터 이미 경쟁은 격심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기술의 뿌리는 어디인가? 그것은 기초과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일 것이다. 당연히 세계 선진 각국은 자국의 기술력 강화와 독립성의 쟁취를 위해, 기초 과학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고, 이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의 간격을 두고 결국 첨단 기술로 이어지기 때문에, 당장 내일의 경쟁력이 아니라, 다음 세대, 다다음 세대의 국가 경쟁력을 위해 더욱 집중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한국에게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최근 일본에서는 지난 2016-2018년, 3년 간 과학기술 각 분야 학술 저널에 출판된 연구 논문에 대한 주요국의 점유율이 상세하게 비교 분석한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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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2016-2018년, 주요 국가의 각 기초과학기술 연구 분야에 대한 논문 점유율 (검은색)과 상위 10% 영향력 논문 점유율 (빨간색)


우선 한국의 데이터를 보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의 가진 최강의 기초과학의 무기는 역시 재료과학이다. 그다음으로 화학, 물리학, 공학이 평균 대비, 꽤 강세를 보인다. 상대적으로 지구환경, 임상의학, 기초생명과학 분야가 약세다. 재료과학은 전체 점유율과 비등할 정도로 상위 논문 점유율이 유지되는데, 이는 한국에서 나온 재료과학 논문들이 양과 질 모두 세계 톱클래스임을 의미한다. 이는 최근 20년 넘게 지속된 나노과학 분야에 대한 정부의 집중적인 투자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화학 역시 비슷한 기조이지만 점유율 자체는 재료과학보다는 다소 낮다. 그래도 화학 역시 논문의 양과 질 모두 준수한 편이다. 다만 생명과학 쪽의 괴리가 조금 아쉬우며, 이는 한국의 생명, 의료분야 관련 기초 연구가 아직도 세계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물론 이 역시 20년 전에 비하면 일취월장한 수준이기는 하다. 만약 투자가 지금처럼 지속되고, 특히 생명과학 분야의 벤처들의 성공 사례가 꾸준히 알려지면, 이 분야에 대한 투자 선순환이 이루어져서, 결국 생명과학, 임상의학 분야의 연구력도 제 궤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나라의 데이터를 살펴보자. 전반적으로 고른 논문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 나라는 독일이며, 영국은 출판된 논문 점유율 대비, 상위 논문의 점유율이 훨씬 강력하게 분포하고 있다. 특히 영국은 임상의학과 기초생명과학, 지구환경과학이 강세다. 오히려 재료과학이나 공학은 상대적으로 큰 영향력이 없다 (물론 전 분야 다 세계 톱클래스다). 미국 역시 임상의학, 기초생명과학, 환경지구과학 분야가 강세이고, 물리학과, 재료과학, 화학도 강세를 보이는데, 공학은 특별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 (즉, 기본 논문 점유율과 상위 영향력 논문 점유율이 비슷한) 수준이다.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추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으로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일본이다. 일본은 예상과는 다르게 학문 전 분야에서 그 영향력이 점점 줄고 있는 모양새다. 즉, 90년대 후반부터 거의 매년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배출해 온 과거, 그리고 지금까지의 영광을 앞으로도 재현할 가능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이 여실히 보인다. 물론 여전히 화학과 물리학은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강세지만, 논문의 점유율 대비, 그 영향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모양새다.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면 대략 20-30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과학 분야의 원천 연구 결과가 노벨상으로 연결되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일본은 2020년대-30년대까지는 간혹 노벨상을 배출하겠지만, 2040년대 이후부터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공학과 재료과학, 수학 같은 분야에서는 오히려 그 영향력이 한국에 약간 못 미친다. 물론 논문 점유율, 영향력 논문 점유율만 가지고 학문의 영향력 전체를 논하기는 무리이지만, 이는 그 자체로도 정말 의외의 결과다. 또한 일본의 임상의학, 기초 생물학 연구력 역시 상위 논문 점유율과 논문 점유율의 괴리가 가장 큰 분야로 보인다. 기초과학의 강국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던 프랑스의 결과도 충격적이다. 대부분 분야의 논문 점유율이 2-3% 수준이며 그나마 물리학이 상대적으로 강세이고, 나머지 분야는 프랑스의 위명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물론 기초과학기술 전 분야에 걸쳐 논문 점유율과 상위 논문 점유율이 크게 차이 나지 않고 있다는 부분은 프랑스가 고르게 알찬 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화학, 물리학, 수학의 상위 논문 점유율은 한국과 별로 차이나 보이지 않는다. 임상의학, 기초 생물학 분야 역시 대동소이하다. 전통의 독일은 확실히 화학, 물리학 점유율이 높은 편인데, 수학은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노벨상을 다수 수상한 과학기술 분야 전통의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 중, 제일 고른 축에 속하는 연구력을 보인다. 생각보다 생명과학, 임상의료의 연구 역량이 타 분야 대비 우수하며, 공학은 의외로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독일의 제조업 경쟁력이 향후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데이터들은 별로 충격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충격적인 데이터는 중국에서 나타난다. 지난 20년 간 논문의 편수뿐만 아니라, 그 질까지 급성장했다고 알려져는 있었는데, 최신 분석 결과에서 나타난 그 성과는 예상 이상으로 두려운 수준에 이르고 있다. 화학, 재료과학은 가히 세계 최강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이고, 공학, 수학 역시 어느새 세계 톱클래스가 되었다. 물리학과 지구환경 쪽 역시 톱클래스 등극이 눈앞에 온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임상의학과 기초 생물학 분야가 약해 보이지만, 이 마저도 톱클래스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특히 재료과학과 화학 논문의 영향력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훨씬 크다는 점이 충격적이다.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이들의 영향력 상승 속도가 세계에서 제일 빠르다는 점이다.


앞서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다루며, 현재 상태의 중국 반도체 기술 수준이 타 선진국에 비해 2-3세대 정도 차이 난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중국이 미국의 제재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티면서 계속 자력갱생을 밀고 나갈 수 있다면, 그 이면에는 아마도 이러한 기초과학 분야의 성과 누적이 자리 잡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것이다. 물론 기초 과학, 특히 반도체와 관련 있을 법한 물리학, 재료과학, 공학, 화학 분야의 연구 성과들이 바로 시차 없이 반도체 기술 분야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이러한 기초 연구 성과 중 상당 부분이 전략적으로 실제 차세대 반도체 기술로 이어질 가능성은 상존한다. 특히, 리소그래피 이후의 차세대 반도체 기술 성립은 신소재 개발이 핵심이다. TMDC (transition metal dichalcogenide) 같은 2D 화합물 반도체, 그래핀 (graphene) 같은 탄소 신소재, 반도체 나노와이어 (nanowire), 나노쉬트 (nanosheet), 나노막대 (nanorod), 나노리본 (nanoribbon), 양자 셀룰러 오토마타 (quantum cellular automata), gate all around (GAA) FET, 3진수 로직 구조, 4진수 로직 구조, 스핀트로닉스 (spintronics), 광 컴퓨터 (optical computer), 실리콘 포토닉스 (silicon photonics), 스커미온 자성재료 (Skyrmion magnetic materials), 뉴로모픽 기술 (neuromorphic technology), 인공신경망이 물리적으로 구현 가능한 소재 (physical system for artificial neural network) 등, 아예 기존과 전혀 다른 개념의 소재나 소자의 아키텍처가 이제는 점점 필요해지는 시점이 도래하고 있다.


이런 차세대 기술들은 회사에서보다는 연구의 큰 제약 없는 국가 연구소나 연구중심 대학교에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연구비가 특수 장비나 소재 문제로 다량 소모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보니, 웬만한 나라들은 전략적으로 기초 R&D 투자를 전방위적으로 확대 감행하기 어렵다. 그런데 중국은 지난 20년 간 중앙 정부와 공기업, 지방 정부 차원에서 꾸준히 이러한 기초 연구들을 각 학교와 기관으로 경쟁적으로 밀어주고 있으니, 결국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고, 과거 몇 년 전만 해도 인해전술이라고 비웃던 수준에서, 이제는 네이처 사이언스 급의 세계 최정상 과학 저널에서도 심심찮게 순수 중국 저자들의 연구를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이들의 실력은 괄목상대하고 있다. 10년만 더 지나면 아마 우리에게 알려진 각 분야의 저명 학술지 논문의 저자 절반이 중국인, 편집진의 대다수가 중국인, 심지어는 일부 저널 퍼블리셔의 절반도 중국 자본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미 그러고 있는 중이다). 학문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과 기술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은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체감이 다를지 모르지만, 결국 이들이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반영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결코 마음 편하게 현재의 기술 격차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다른 것보다 반도체 굴기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중국의 재료과학, 물리학, 화학 분야의 눈부신 약진이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들 분야의 연구, 특히 신소재 개발을 위한 실험과학 분야의 연구는 실제로 신물질 특허, 신공정 특허로 쉽게 연결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수백, 수천 개 반도체 소재/공정/소자 관련 기업에서는 인력과 자본을 갈아 넣어 백 개 중에 한 개, 천 개 중에 한 개를 골라낸다는 각오로 신기술 개발에 매진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백 개의 후보 소재 가운데 간신히 한 개의 신소재를 찾고 있을 때, 중국 연구진은 같은 시간 동안 만 개의 후보 소재 가운데 백 개나 찾아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백 개의 물질을 모조리 특허 걸어 버리고, 원천 기술을 독점할 수도 있다. 차세대 반도체 기술의 breakthrough가 과연 어디에서부터 터질 것인지는 아무도 쉽게 예상할 수 없지만, 결국 이 100, 10,000개의 후보 기술 중에서 무조건 나와야 하는 사정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시간과 자원, 그리고 돈과 인력은 중국 편이므로, 중국은 차세대 반도체 기술 전쟁 국면에서 장기간 성 안에 틀어 박혀 버티기 모드로 들어갈 자신감이 생길 법도 하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앞으로 대외적은 요인에 의해 더욱 많은 압박에 놓이게 될 것이고, 자국의 기술력으로 해결이 안 되는 초격차 공정 기술과 설계 기술 측면에서는 점점 세계 수준과의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은 더욱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할 것이며, 더욱 노골적인 인재 유치와 기술 IP 해킹 시도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내부에서 버티기 모드로 들어가 장기전에 임할 수 있는 체력을 기를 것이고, 그것은 중국이 국가적으로 연구개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 기초과학분야, 특히 신소재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성과로 집약되어 나타날 것이다. 중국은 반도체 기술 굴기의 미래를 아직 포기할 마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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