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중국 반도체 기술 굴기의 미래

1. 들어가며: 첨단 정보통신 기술 전쟁의 서막

by 권석준 Seok Joon Kwon

1.1. 중국 반도체 기술 굴기의 이면

지난 2020년 8월 28일,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의 반도체 파운드리 (설계가 끝난 반도체 칩을 위탁받아 대리 생산해 주는 반도체 업체) 회사 SMIC를 넘어, 전 세계 파운드리 업계 1위인 대만의 반도체 전문 기업 TSMC와 2위인 한국의 삼성전자에 야심 차게 도전장을 내민 중국의 파운드리 회사 HSMC (Hongxi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가 3년 전 거액의 투자를 받은 후 반도체 기술 개발을 해 오기는커녕, 중국 정부의 투자금 (보조금) 무려 153억 위안 (한화 약 2조 6천 억 원)을 사기 쳤다는 소식이었다. 참고로 HSMC는 지난 2017년 11월 설립 당시, 1,280억 위안 (한화 약 22조 2,600억 원) 규모의 투자금을 확보했다고 주장하며, 업계에 신성처럼 등장한 후, 자국의 SMIC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기술 수준인 10 nm 패터닝 (Patterning, 반도체 회로에 미세한 크기의 전자 회로를 새기는 공정)을 넘어, 중국 최초로 7 nm 공정 양산을 2020년까지 단 3년 만에 성공적으로 시작하겠다고까지 호언장담했던 반도체 업체다.


2020년대가 시작되는 이 시점,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의 공통적인 핵심 기술은 단연코 초미세 패터닝 (patterning)이다. 여기서 말하는 초미세 패터닝은 반도체 기판 위에 새겨지는 전자 회로의 물리적 선폭을 10 nm 이하로 축소시켜 실리콘 웨이퍼 위에 집적시킬 수 있는 기술을 의미한다. 더 작은 모눈종이를 사용하면 더 세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더 작은 선폭의 회로는 단위 웨이퍼 당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시킬 수 있게 해 주므로, 결국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이 된다. 그렇지만 전 세계 반도체 업계에서 이 10 nm 이하의 패터닝 장벽을 넘은 회사는 손에 꼽는다. 그것은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 단 두 곳이다. 당연히 10 nm 아래로 가야만 기술 경쟁에서 버틸 수 있는 반도체 기술 전쟁 국면에 놓인 중국 입장에서는 신규 패터닝 기술과 경쟁력 갖춘 수율, 그리고 양산 기술에 사활이 걸려 있는 상황이다. 특히, 2010년대 들어, 중국은 자국 정부 주도로 분야 가리지 않고 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에 혈안이 되어 있고, 기술 잠재력이 있는 회사라면 집중적인 투자를 해 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혜성 같이 등장한 HSMC가 단단한 동아줄 같은 회사로 보였을 것이다. 중국 제1위의 파운드리 업체이자 세계 4-5위권 업체이기도 한 SMIC의 최신 패터닝 기술마저 2020년 상반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14 nm 정도에 멈춰 있는 상황이다. 그 SMIC도 못 하고 있는 10 nm 이하의 패터닝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회사라면, 중국 정부는 아마 영혼까지 바치겠다는 기세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 몇 사람에게 이 회사 관계자와 회사의 핵심 기술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맡겼다면, 아마 이들이 전형적인 사기꾼임을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설립자가 이 분야에서 잘 알려진 사람도 아니고, 경력이 딱히 긴 것도 아니고, 고유한 특허가 있는 것도 아니고, 투자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불확실하고, 더구나 투자 규모가 2천억 도, 2조도 아닌, 무려 22조를 넘는 수준이 될 정도면, 거의 TSMC급 기술력을 갖춘 회사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런 회사는 중국에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전 세계에서 TSMC와 삼성전자 두 회사만 보유하고 있는 7 nm 공정 기술을, 신생 업체가 어떻게 단 3년 만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 그 확률을 생각하면, 이 모든 팩트들은 이들이 사실상 눈먼 투자자를 노린 사기꾼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도체 굴기에 눈이 먼 중국 정부의 각종 보조금은 어디로 인가는 반드시 데드라인에 맞춰 투자되어야 하는 관계로, 중국 정부는 이 회사의 화려한 제안에 앞뒤 생각 않고 낚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이들의 사기 내역을 들여다보면 전형적인 투자 사기꾼들의 수법이 보인다.


보도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징조는 예전부터 있었다. 즉,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거액의 사기로 인해 입을 막대한 피해를 조금이라도 사전에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애초 회사 설립자 리쉐옌이라는 사람의 출신이 불확실하니, 이에 대해 뒷조사를 더 철저하게 했어야 했고, TSMC에서 스카우트한 CTO 출신 CEO인 장상이 (蔣尙義)라는 사람의 계약 조건을 더 잘 살펴보았어야 했다. 성과 달성에 대한 인센티브가 명시되어 있지 않거나, 조건이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다면 좀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지난 1월에는 HSMC가 공장 건설 대금은 물론 건설 노동자의 임금을 수개월씩 지불하지 못해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는데, 거액의 투자를 받은 회사가 건설 대금, 인력 임금을 지불 유예하고 있었다면,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챘어야 했다. 지난 7월에는 우한시 정부가 “자금 부족으로 HSMC 반도체 프로젝트 좌초 위기”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펴냈지만, 후속 조치를 '추가로 투자하기 어려움' 정도로 약하게 내려 버린 것도 화근이 되었다. HSMC의 CEO 장상이도 예전부터 스스로가 설립자들의 사기극에 놀아났고, 하루빨리 자리를 내려놓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당 기율위원회 등이 이 상황을 제대로 모니터링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기사에 따르면 HSMC를 세운 창업자이자 그 출신 배경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리쉐옌의행방은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전형적인 사기꾼들의 모습이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HSMC 지분 90%를 가진 베이징 광량란투 테크놀로지라는 업체는 HSMC와 같은 2017년 11월에 설립되었는데, 두 회사 모두 페이퍼 컴퍼니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한다. 이어 “2017년, 회사 설립자들이 주장했던 투자금 1,280억 위안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HSMC 설립 3년 동안 기술 특허 하나 나온 게 없다”고도 보도되었다. 더 기가 막힌 대목은 이것이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HSMC가 중국 업체 중 유일하게 보유 중이라고 자랑했던 7 nm 공정 용 최첨단 노광 장비가 은행에 압류됐는데, 알고 보니 이미 수년 전에 나온 철 지난 장비였다”는 부분이다. 전형적인 투자금 끌어들이기 사기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이 명확해지는 부분이다. 이러한 증거들만 놓고 보면, HSMC의 사기 행각은 투자 보조금 가로채기 용 사기 수법을 교과서적으로 재현한 케이스임을 알 수 있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중국 정부는 정말 맹목적으로 이 회사에 투자한 후 3년이나 전혀 견제와 체크를 하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이들의 사기가 성공하지 못하도록 견제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일반 사기업에 투자하는 투자회사도 계약된 기술이 제시간에 개발될 수 있는지 주기적으로 기업 실사 (due diligence)를 하면서 꼼꼼하게 기술 진행 상황을 체크한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가 HSMC에 대해 꼼꼼한 기업 실사를 벌였다는 증거는 없다. 기업 실사가 아니었더라도,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주기적으로 기술의 마일스톤이 특허로 나와야 한다. 그렇지만 중국의 특허 관리 담당 기관인 국가지식재산권국 (國家知識産權局)에서도 이를 감지하지 못했다. 고리고리마다 이들의 사기 행각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고리고리마다 이 허술함을 넘어 가게 해 줄 모종의 안전장치가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한국 같았으면 꼼꼼한 관료들이 중간중간 안전장치를 만들어 놨겠지만, 이 회사에 대해서는 어떤 영문인지 정부 기관의 견제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기 규모가 조 단위라, 이로 인해 회사 관계자는 물론, 관리들도 상당수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사기성 사업 케이스가 21세기, 특히 2010년대 들어 중국 정부가 맹렬히 주도하고 있는 자국의 첨단 하이테크 산업, 특히, 반도체 굴기 곳곳에 비일비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중앙 단위, 지방 단위, 회사 단위로, 눈먼 산업 보조금과 재정 혜택이 중구난방으로 중복된 상황에서 집행되고 있고, 이것을 실시간으로 중앙 집권 체제에서 주도면밀하게 관리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크고 복잡한 데다가, 더구나 현 시진핑 정권 하에서의 산업 굴기 목표가 정부가 설정한 데드라인인 2025년 이전에 달성되어야 하므로, 중앙 정부가 조급한 추진을 독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내부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 속사정을 일일이 알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사기 사건이 앞으로도 계속 벌어진다면 그 끝은 중국 인민들에게 별로 행복한 결말은 아닐 것이다.


1.2. 본격화되는 미국의 중국 반도체 산업 견제

중국 반도체 기술 굴기의 상황은 중국 내부에서만 심각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20년 9월 4일 자로 미국 정부는 화웨이에 이어, 중국의 파운드리 업체 SMIC를 제재 대상으로 검토한다는 소식이 나왔다. 이미 2019년과 2020년 초, 미국 정부는 중국 최대의 반도체 업체이자 통신 장비 업체인 화웨이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를 발표했고, 그 시행은 이제 2020년 9월 15일부터 현실화된다. 통신용 칩셋과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해 온 반도체 업체 화웨이는 더 이상 해외의 파운드리 업체에 자사의 주문을 위탁 생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설사 간접적인 방법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위험 감수와 중개에 의한 원가의 상승, 그리고 시간 지연이라는 요소가 추가되므로, 가격 경쟁력이 급속 하락하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화웨이는, 그리고 나아가 기술 굴기를 꿈꾸는 중국 정부는 자국에서 칩을 생산할 수 있도록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를 전략적으로 키우려 할 것이고, 그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업체가 바로 SMIC였다. 그런데 SMIC에마저, 이제는 미국이 본격적으로 그 숨통을 조이려는 의지가 구체화된 것이다. 화웨이가 통신 반도체, 시스템 반도체 설계에서 경험치를 쌓고, 설계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결국 실질적으로 이를 하드웨어 칩으로 만드는 것은 수율 관리가 되는 파운드리 회사가 파트너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제재 전에는 화웨이가 SMIC보다는 TSMC에 주로 의존했지만, 제재가 현실 국면으로 접어든 이후에는 TSMC와의 거래가 대부분 차단되는 상황으로 흐르기 때문에, 자국의 SMIC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러한 화웨이의 약점을 간파했고, 중국 반도체 산업의 목줄을 더 세게 조여 가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이런 조치의 시행이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예전부터 예상하고 있었으나, 실제 시행 시점이 모두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도달했다.

SMIC 입장에서는 이미 미국 AMD, 대만 TSMC와 최근까지는 한국의 삼성전자에서 고위직 기술 책임자로 일하며 선진 반도체 공정을 두루 경험했던 S급 핵심 인재이기도 한, 대만인 량멍쑹 (梁孟松) 같은 인재까지 CEO로 영입해 가며, 공들여 초미세 패터닝 공정에 몰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량 사장의 영입 이후, SMIC의 초미세 패터닝 기술은 14 nm까지 안착할 수 있었고, 대만의 TSMC, 그리고 한국의 삼성전자 두 회사만 밟아 본 7 nm 이하의 초극미세 패터닝이 보이기 시작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번 조치로 인해 이제는 그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확률이 현저히 낮아졌다. 물론 공정에 필요한 각종 광학계, EUV (Extreme UV) 같은 노광 장비, 펠리클 (pelicle) 등의 장비나 부품을 자체 생산하여 제품의 퀄리티를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을 수만 있다면, 이 기술적 시련의 극복은 시간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중국의 반도체 관련 분야의 기초과학기술 연구개발 투자 규모도 거대하고, 그 성과도 계속 누적되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어 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이미 기술 생태계가 단단하게 형성되어 있고, 선행 기술이 궤도에 올라 있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다. 중국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SMIC의 현 상황은 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SMIC의 자체 기술만으로는 7 nm 이하의 초극미세 패터닝 기술 단계로 진행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1.3. 미-중 반도체 전쟁의 전개

이렇듯, 미국이 설계해 온 대 중국 반도체 기술 및 무역 제재 조치가 차곡차곡 표면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초래된 중국 정부의 급박함,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된 대규모 사기 사건을 놓고 보았을 때, 우리는 미-중 간 반도체 기술 경쟁 국면이 실로 총칼만 안 들었지, 사실상 전쟁이나 마찬가지인 심각한 상황으로 흐르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앞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대 중국 반도체 기술 제재 국면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 주도의 대 중국 반도체 기술 전쟁 기조가 굳어지면, 중국은 정말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 상황에서 중국이 과연 자국의 기술력만으로 이 사면초가의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모든 국가적 비전을 잠시 유보하고, 즉,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미국이 주도하는 산업 질서의 그늘 밑으로 확실하게 편입하여 미국을 비롯한 선진 제조업 중심 나라들의 공장 역할 정도로 만족하는 수순에서 연착륙을 시도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제3의 길 (즉, 신개념 반도체 아키텍처 설계나 실리콘이 아닌 다른 종류의 반도체 신소재 개발 등)을 제시할 것인지는 그때 가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만약 첫 번째 옵션을 택한다고 결정하였을 시, 관건은 중국이 제재를 버티는 동안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자금력이 지속될 수 있는 기간이다. 그러나 기축 통화국이 아닌 중국 입장에서는 결국 그들이 믿고 있는 거대한 외환 보유고라는 화수분이 생각보다 일찍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을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자금이 버티지 못하면,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속된 말로 ‘돈 놓고 돈 먹기’ 싸움에 가까운 빠른 기술, 금융 사이클의 반도체 산업, 치열한 반도체 기술 경쟁에서, 중요한 것은 투자의 타이밍이다. 우선 기술의 사이클을 고려하여 적기에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투자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 달이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고, 이는 비용 상승과 기술 격차로 나타난다. 제품의 세대에 격차가 생기면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 더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 규모는 격차에 비례하는 생산 비용 격차를 해소하기 위함이다. 만약 격차가 충분히 해소되지 못한다면, 생산하는 제품은 원가보다도 낮은 가격의 제품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결국 생산하는 족족 재고가 되어 사실상 매몰비용이 된다. 투자가 제때 이루어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또한 적기에 투자가 회수되는 것이다. 그런데 양산된 제품의 순조로운 판매로 회수되어야 할 자금이, 이렇게 오히려 비용이 되어 버리는 상황이 되면 자금 회수는 점점 어려워진다. 기 투자된 자금은 제품의 양산을 통해 제때 회수되어야 금융 비용을 상계하고 차세대 연구개발 투자 비용을 확보할 수 있는데, 만약 자금의 회수 시점이 늦어지거나 불가능하다면, 금융 비용 상승으로 인해 격차의 해소는 더더욱 어려워지고, 차세대 제품에서의 기술 경쟁력은 이미 몇 수 접고 들어가는 불리한 상황이 된다. 차세대 원천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특허 제휴 같은 방식으로 경쟁 기업의 신기술 IP를 확보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결국 시장에서 계속 살아남으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외부에서 추가로 막대한 규모의 자금이 투입되지 않는 한, 그 반도체 생산 라인은 돈 먹는 하마가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악순환을 막을 수 없다.


미국의 압박과 제재로 코너에 몰린 중국의 반도체 굴기 현실은 이러한 악순환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미 그 순환 고리에 빠져든 것일 수도 있다. 내수 시장에서의 버티기로 이 악순환을 감내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시장의 변동에 취약하다는 것이 주된 특징이므로, 중국의 반도체 관련 기업들은 순식간에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중국 정부의 보조금이 없다면 더 버티기 어려워질 것이다. 중국이 지난 20년 넘게 애써 가꿔 온 자국의 반도체 산업이 10년 내로 붕괴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10년 간의 반도체 협정으로 인한 미국의 무역제재가 있긴 했지만, 기술적인 압박은 없었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반 세기도 안 되어 사실상 붕괴하다시피 한 전례가 오버랩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1.4. 미-중 반도체 기술 전쟁이 한국에 시사하는 점

문제는 이것이 한국 입장에서는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강 건너 불구경할 때가 전혀 아니라는 이야기다. 2019년 기준, 한국의 삼성전자 매출 중, 화웨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7.3조 원으로서 삼성전자 연간 매출의 3.2%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의존도는 더 높다. 연간 매출액 중 약 3조 원이 화웨이로부터 발생되는데, 이는 SK하이닉스 전체 매출의 11.4%에 달하는 비중이다. 중국의 하이테크 산업으로 확대하면 두 회사의 대 중국 의존도는 더욱 높아진다. 삼성전자의 경우 2019년 기준, 중국 매출 비중이 24%에 달하고, SK하이닉스는 무려 46.4%에 달한다. 2020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화웨이를 비롯한 대 중국 반도체 기술 및 제품 거래가 중단되면, 삼성전자도 막대한 매출 및 수익 손해가 있겠지만, SK하이닉스는 더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될 것임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비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국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중소기업들의 중국 매출 의존도는 중국의 적극적인 반도체 기술 굴기 투자로 매년 올라가는 추세였다. 2019년 기준, 한국의 반도체 관련 수출품의 57%는 중국 (39%)과 홍콩 (18%)이 수입하고 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시장은 당분간 사업의 리스크가 매우 커질 전망이다.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에 걸리지 않으려면, 한국의 많은 반도체 산업 관련 중소기업들은 중장기적으로는 중국으로의 수출 중단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이는 곧바로 대중 수출 의존도가 높던 많은 기업들에게는 시장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기업들은 누적된 적자로 결국 도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국 현지에 진출한 기업들 역시 중국 내수용은 물론,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이들의 수출 전략 역시 미국의 제재 조치로 인해 먹구름이 끼게 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중저가 중국산 반도체 소재, 부품의 수입으로 유지되어 온 한국의 반도체 관련 산업의 원가 경쟁력 역시, 미-중 간 반도체 전쟁으로 인해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중국에 대해 반도체를 비롯, 첨단 하이테크 산업 소재와 부품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한국은 미-중 간 반도체 전쟁을 남의 일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중국이 차지하고 있던 반도체 수출 시장의 일부를 한국의 기업들이 대체하는 효과를 누리는 장점도 있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중국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그 존재감이 상실될 경우, 세계 반도체 시장 자체가 축소되어 많은 기업들의 설비와 기술 개발 투자가 과대 비용으로 계상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1.5. 미-중 반도체 기술 전쟁에서 한국이 던져야 할 질문

한국은 이제 날로 격심해질 미-중 반도체 전쟁의 국면에서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야 한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장기적으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중국이라는 리스크를 어떻게 회피할 수 있을까?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과연 그 리스크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중국은 반도체 산업을 지키기 위해 내수 시장만으로도 버틸 수 있을까?
-세계 수준 대비 중국의 반도체 기술 격차는 결국 해소될 수 없을까?


이러한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왜 이렇게 심각한 반도체 기술 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고, 그들이 외치는 반도체 기술 굴기가 어떤 미래를 맞을 것인지에 대해 깊게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하나씩 그 속사정을 살펴보고, 위의 질문에 하나씩 답을 찾아보면서, 그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한 번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keyword
이전 07화일본 반도체 왕국 쇠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