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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 기술 굴기의 미래

2.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중국몽을 이룰 수 있을까?

by 권석준 Seok Joon Kwon

2.1. 화웨이의 급부상과 그에 대한 견제

1편에서 보았듯, 중국의 화웨이는 최근 미국이 주도하는 사상 초유의 기술 제재 국면이 본격화되면서 창사 이래 초유의 전사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자국 기업 및 미국 기업과 거래하는 회사들의 대 중국 기술 수출 제재가 자리 잡고 있지만, 더 큰 원인은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2인자로서의 중국이 지금보다 더 커지기 전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부터 그 수족을 자르려 하는 미국이 초당적인 의지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화웨이가 10 nm 이하의 초미세 스케일의 패터닝 기술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려는 미국이 주도면밀한 기술적 브레이크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이 대 중국 반도체 기술 및 무역 제재의 핵심 타깃으로 하고 있는 화웨이는 어떤 기업인가? 중국을 대표하는 IT 대기업 화웨이의 정확한 명칭은 ‘화위기술유한공사 (華為技術有限公司)’다. 1988년, 중국 인민군 통신부대 장교 출신 창업자 런정페이 (任正非)가 설립한 이 회사는 그 요체가 사기업 (公司)이지만, 실제적으로 그 성격은 공기업 (公社)으로 분류되고 있다. 애초 화웨이의 사명부터 ‘중화 (華) 민족을 위 (為)하여’다. 설립 초기부터 적어도 2000년대 중후반까지의 20여 년 정도는 주로 내수 시장 위주로 중국 경제의 급성장에 맞춰서 회사 회사 역시 성장을 거듭했다. 특히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이 회사를 거의 전략적으로 키우다시피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중국 인민해방군, 각 성의 통신 기반 시설 등 굵직한 사업을 독점 수주할 수 있도록 관급 프로젝트를 화웨이로 밀어주다시피 해 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화웨이의 경영은 중국 공산당 당위원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公司라는 이름과 무색하게, 사실 상 공산당 산하 公社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종합 IT기업이라고는 하지만, 기업의 요체는 역시, 설립 당시의 핵심이기도 한 통신 사업, 그중에서도 흔히 이야기하는 이동통신 네트워크 장비 제조 및 서비스 비즈니스다. 화웨이가 2000년대 중후반까지는 그럭저럭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중국 통신 내수 시장에 대한 독점으로 버틸 수 있었는데, 시장이 포화에 다다르자 그 이후의 행보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꾸준히 두 자리 수의 매출, 수익 성장률을 달성해야 하니, 자국의 시장을 넘어,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때 캐나다 주식시장 시가 총액 규모의 1/3까지 차지하고, 임직원 숫자만 10만 명에 달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로 거대했던 캐나다 통신 장비 대기업 노텔 (Nortel) 같은 경우는 그러한 화웨이의 해외 진출 희생양이 된 기업의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2000-2009년까지 약 10년 간, 중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직간접적인 해킹으로 인해, 자사의 통신 장비 설계도와 각종 내부 기술 관련 비밀이 유출되었고, 이미 그렇지 않아도 4G 이동통신 기술 주도권 상실로 사세가 기울던 노텔은 결국 지난 2013년, 다국적 기업 연합에게 특허가 모두 팔리면서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노텔뿐만 아니라 미국의 통신 장비 대기업인 시스코 (cisco) 같은 업체 역시 원격으로 접속하는 방식으로 회사 내부의 네트워크에 접근하는 중국의 해킹으로 인해 자사의 통신 장비 소프트웨어의 소스 코드가 대량으로 털렸음을 밝히기도 했다. 유럽 각국의 통신 회사들 역시, 화웨이가 수출한 통신 장비에 심긴 백도어 (사용자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주기적으로 제조사의 중앙 서버로 전송하는 보안 불안 요소)로부터 사용자의 개인 정보 등이 지속적으로 유출되어 중국으로 송신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기적으로 우려와 분노를 천명했을 정도였다.


세계 시장에서는 후발 주자였던 화웨이가 쉽게 시장의 장벽을 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기본적으로 화웨이는 중국에서의 밀어주기 정책에 힘입어 회사의 덩치를 키우고 자금을 충분히 확보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경쟁 업체의 기술에 대한 유출과 해킹으로 부족했던 기술력을 확보하는 편법을 사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기술개발 비용은 물론 기술 노하우를 활용한 원가가 절감되어 가격 경쟁력이 확보되었다. 타사의 특허에 대한 로열티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고, 모방과 복제가 반복되어도 견제를 받지 않아 제품의 단가는 내려갈 수 있었고, 덕분에 타사 대비, 반값 수준으로 가격 경쟁력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슷한 성능이라면 반값의 화웨이의 제품을 쓰는 것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니 화웨이의 세계 시장 진입은 순조로웠던 것이다. 특히 단일 품목의 통신 장비만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엮인 수직 계열화된 통신 장비들을 세트로 같이 구매했으니, 유럽은 물론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 등에서의 통신 장비 시장에서 화웨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급성장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하이테크 기업들의 통신 장비까지 화웨이가 조금씩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단순한 해킹 정도로 무시하려던 화웨이의 기술 유출 시도가 점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기술 유출 시도는 용인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국가 안보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군산 기업에까지 그 마수가 뻗쳐, 각 나라의 핵심 이해관계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기업이 시도했어도 문제였을 해킹 사건이, 알고 보니 중국 공산당 정부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강하게 의심되는, 기업의 탈을 쓴 일종의 정치 조직의 시도로 밝혀졌으니, 이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었다.


미국은 트럼프 정권이 출범하기 이미 한참 전부터, 화웨이를 필두로 하는 중국 IT 기업들의 서구권 기업, 특히 미국의 통신, 반도체, IT 서비스 기업 등에 대한 다양한 해킹 시도를 정보기관들이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있었고, 이들의 배후에는 중국 정부가 있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2010년대 들어, 이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직간접적으로 보냈지만, 그래도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은 노골적으로 중국에 대해 적대감을 표면화하지는 않았었다. 물론 중국의 국가 차원의 해킹 시도 등에 대해 지속적인 경고 메시지는 적립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조는 2016년 트럼프 정권이 출범하자, 트럼프 정권에게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다지고 내부의 반감을 외부로 돌릴 수 있는 일석이조의 적절한 기제가 되었고, 마침내 2019년 5월, 트럼프 대통령은 정보통신 기술 및 서비스 공급망 확보에 관한 행정 명령에 서명함으로써, 화웨이의 미국 내 비즈니스 효력을 정말 정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조치로 인해, 화웨이와 미국 국적 기업 사이의 거래는 원천 차단되었다. 1년 후, 2020년 5월, 이번에는 더 강력한 조치가 발효되었다. 아예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계 IT 테크 기업들이 미국의 기술이 하나라도 들어 간 반도체 소재/부품/장비를 구매할 수 없도록 하는 제재 조치를 발효한 것이다. 심지어 미국 국적 기업이 아니더라도, 미국 특허로 등록된 기술을 사용하는 제3국의 기업이 화웨이와 거래할 경우, 미국은 그 제3국의 기업을 제재할 수 있는 권리 (세컨더리 보이콧 (secondary boycott))를 갖게 하는 막강한 조치였다. 2020년 9월 15일부터 이 조치의 실제로 효력이 발동된다.


2.2. 화웨이와 TSMC의 관계

하지만 이 두 번째 조치가 실제로 타기팅하는 쪽은 TSMC로 보인다. 대만에 본사를 두고 있는 세계적인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인 TSMC는 10 nm 이하의 최신 초극미세 패터닝 공정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로 가장 많은 웨이퍼를 생산할 수 있는 회사 (2위 삼성전자)로 인정받고 있다. 심지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한국의 삼성전자도 10 nm 이하 패터닝 공정에 대해서라면 수율과 양산에 있어 TSMC에게 밀리는 형국이다. 화웨이의 자회사이자 CPU 설계 회사인 중국의 하이실리콘 (Hisilicon)의 경우, 팹리스 (fabless) 회사다. 즉, CPU, AP, GPU 같은 비메모리 반도체 칩의 ‘설계’까지는 하지만, 직접 그 칩을 생산할 능력이 없다. 설계는 되는데 생산하거나 테스트할 능력이 없는 회사들을 위해 반도체 칩을 제조해 주는 회사들이 바로 TSMC 같은 파운드리 회사들이다. 거국적으로 보면 같은 중화권으로 묶이는 화웨이 (즉, 하이실리콘)와 TSMC의 공생 관계는 꽤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2019년 기준, TSMC 전체 매출의 15%는 화웨이에서 나오고 있을 정도로 TSMC는 화웨이와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기업 활동에 중요했다. 특히, 2010년대 이후, 화웨이가 통신 장비 사업 너머 IT 비즈니스 다방면으로의 공격적인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에는 TSMC의 전폭적인 반도체 칩 공급과 맞춤형 파운드리 공정이 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가 발동한 대중국 기술 제재 조치에서 예외는 아니었던 TSMC는 조치가 발표되자마자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칩 공급을 중단할 것이라 선언했다. 심지어 120억 달러 규모의 5 nm 공정 팹을 아예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 건설하고, 미국의 파운드리 회사들과 전략적 기술 제휴를 하겠다는, 이전과 확실히 다른 전향적인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일단 큰 불을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TSMC에 의존도가 높았던 화웨이로서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화웨이는 2위 그룹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그리고 미국의 글로벌 파운드리 (Global Foundry) 같은 업체를 차선책으로 수소문했다. 물론 이들 기업들이라고 해서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 정책의 예외가 될 수는 없으며, 결국 화웨이는 미국의 제재 조치가 지속되는 한, 외국 업체와의 제휴는 불가능하니, 자국 내에서 어떻게 해서든 반도체를 자국에서 생산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따라서 미국의 조치가 실효를 가지게 되는 순간 이후, 이제 화웨이, 더 넓게는 중국이 과연 자국 내 자원과 기술만으로 최신 세대의 기술로서 반도체 칩을 만들 수 있는지가 실질적인 관건이 되는 것이다.


2.3. 중국 최신 반도체 기술의 현황

그렇다면 이제 시선을 돌려 과연 중국이 스스로 만들 수 있는 CPU 그리고 반도체 공정 기술은 어느 수준까지 와 있는지 알아보자. 대만의 VIA라는 CPU 회사는 2013년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상하이 시와 합작 회사를 세우는 대신, 자사의 기술 라이선스를 중국 회사 자오신 (Zhaoxin)에게 넘기기로 합의했다. 최근 자오신이 내놓은 CPU가 KaiXian KX-6000라는 모델이다. 팹은 TSMC의 16 nm 공정에 위탁 생산하였다. 이 칩의 최고 클럭은 3.0 GHz이며, 8 코어로 스펙이 명시되어 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성능은 평범한 인텔의 내장 그래픽 칩만도 못하다. 인텔의 중저가 CPU Core i5-7400급에서 1920´1080 해상도로 90 fps의 속도를 보일 때, Zhaoxin 칩은 15-20 fps 정도의 밖에는 내지 못한다. 동일 클럭 수에서는 두-세 세대 이전 AMD CPU인 브리스톨 릿지급과 유사한 성능을 보인다. 동일 세대 인텔의 x86 칩과 비교해 봐도, Zhaoxin 칩은 미국의 CPU 대비, 대략 1/3 이하의 성능이다. 그런데 단위 작업 당 소모되는 전력은 훨씬 높아서, 동일 세대의 CPU 대비, 대략 2-3배의 전력을 필요로 한다. 가성비를 따지면 현세대 CPU의 대략 1/9 수준밖에 안 되는 셈이다. 애초에 가성비가 동일 세대 대비 10% 정도 밖에 안 나오는 칩이라면, 그것은 팹 공정과는 상관없이, 반도체 칩의 설계 기술 수준이 선진 업체 대비 적어도 1-2 세대 이상 뒤져 있었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의 발전 속도는 무섭다. CPU 같은 비메모리 반도체뿐만 아니라,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리고 미국의 마이크론이 과점하고 있는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역시 무서운 기세로 따라오고 있다. 중국 정부는 낸드 (NAND) 플래시 메모리 양산 업체인 중국 국유기업 YMTC 등에 2025년까지 1조 위안 (한화 약 170조 원)을 투자하며 삼성전자의 주력 아이템 중 하나인 DRAM 사업을 따라잡으려 하고 있다. 특히, 최신 DRAM 메모리의 용량 확보에 필수 불가결한 기술이 된 3D 적층 구조 구현에서도, YMTC는 2019년 64단 3D 낸드플래시 메모리 양산에 이어, 2020년 90단, 2021년까지 128단의 3차원 적층 구조 기반의 3D 낸드플래시 메모리 기술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제로 화웨이를 필두로, 중국의 반도체 기업들의 성장 가능성은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CPU 설계 업체 하이실리콘은 화웨이의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급성장에 힘입어, 자사의 AP칩 ‘기린’을 통해 중국 내수 시장을 장악했다. 2020년 1분기만 해도, 하이실리콘은 중국 스마트폰 용 AP 시장에서 44%에 달하는 점유율을 보였다. 화웨이가 손을 뻗고 있는 사업은 또한 서버용 반도체 분야다. 서버는 애초에 대용량 데이터의 안정적 처리가 관건이므로, CPU가 많이 필요하다. 이 역시 하이실리콘이 독점 공급하였는데, 하이실리콘은 ‘쿤펑’이라는 브랜드 명을 가진 서버용 CPU를 공급했다. 특히 5G 무선통신 분야에서도 하이실리콘은 ‘바룽’이라는 통신 칩셋을 화웨이에 공급하고 있다. 화웨이가 AI, IoT, 드론, 자율주행차 같은 차세대 IT 영역까지 비즈니스 영역을 넓혀간다고 해도, 어쨌든 각 기기에서 대용량의 정보를 처리할 반도체 칩이 필요한데, 아마도 설계는 모두 하이실리콘에게 맡길 것이다.


2020년 7월, 중국에서는 아예 OS와 CPU 모두 자급자족한, 즉, 첫 순수 중국산 PC인 ‘톈위에 (Tian Yue)’를 선 보이기도 했는데, 이 역시 하이실리콘을 필두로 한 중국의 여러 CPU 설계 회사들과 중국 정부가 주도한 OS의 합작품이다. 자국산 OS인 ‘기린 (Kyrin, 혹은 하모니) ‘가 탑재된 이 PC는 중국 항공과학산업그룹 (CASIC)에 의해 개발되었고, 이는 중국 랴오닝성 공장에서 생산된다. CPU는 중국의 파이티움 (飞腾, Phytium), 룽손 (龙芯, Loongson), 쿤펑 (鯤鵬, Kunpeng), 하이라이트 (Highlight), 자오신 (兆芯, Zhaoxin), 썬웨이 (神威, Sunway) 등 6개의 중국산 CPU를 장착하고 있다. 당연히 회사는 달라 보여도 배후에는 하이실리콘, 그리고 화웨이가 있다. 중국 정부의 반도체 생태계 형성 의도가 다분히 보인다. 룽손의 CPU는 3A4000과 3B4000의 4 코어 2.0 GHz, 28 nm, 파이티움의 CPU는 FT-2000의 4 코어 2.6~3.0 GHz, 16 nm이 있으며, 쿤펑의 ARMv8 기반 920 CPU는 7 nm 공정에 최적화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썬웨이의 Sunway1621는 4 코어 2 GHz, 28 nm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이티움 역시 슈퍼컴퓨터 전문 CPU 업체로서 한국에는 ‘텐허 (天河)’라는 리눅스 기반 슈퍼컴퓨터로 잘 알려져 있다. 역시, 두-세 세대 이상 차이 나는 아키텍처로 극한까지 성능을 끌어올리면서 ARM 계열 CPU를 설계하고 있다.


문제는 하이실리콘 자체적인 CPU 설계 역량의 상당 부분은 알고 보면 다 자체 능력은 아니라는 점이다. CPU 설계는 이미 많은 부분이 기존의 반도체 설계 및 생산 기업에 맞게 최적화되어 있고, 이 중 일부는 전자 설계 자동화 SW인 EDA (Electronic Design Automation, 반도체 전자 설계 자동화 툴)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애초에 팹리스 회사들이 EDA를 피해서 CPU를 설계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업계의 생태계는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온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EDA의 주요 회사들은 모두 미국에 본사가 있다. EDA 시장은 시놉시스 (Synopsys)와 케이던스 (Cadence Design Systems), 멘토-지멘스 비즈니스 (Mentor, a Siemens Business)가 전 세계 EDA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당연히 미국의 제재 조치는 이들 기업의 EDA가 중국 반도체 설계 회사에서 사용되는 것을 금하며, 따라서 중국 CPU 회사들은 최적화된 EDA 없이 반도체 칩을 설계해야 한다.


2.4. 미국의 기술 제재에 대한 중국 반도체 업계의 대응 전략

사실 2010년대 중반부터, 화웨이를 필두로 한 중국의 IT 기업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재 움직임에 대해 꾸준히 대비를 해 왔다고 런정웨이가 몇 차례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중국은 반도체 기술 굴기를 기치로 내걸며 2020년 상반기에만 1,400억 위안 (한화 22조 원)이 넘는 투자를 했고, 앞으로도 그 풍부한 자금력으로 어디까지 반도체 기술을 자급할 수 있을 것인지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미국의 제재 조치가 본격화되면서 TSMC는 물론, 다른 파운드리 회사들과의 거래가 불가능해져, 중국의 위탁 물량을 소화할만한 파운드리 회사를 찾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중국에는 SMIC (중국명: 쭝신궈지 (中芯國際))라는 5위권 파운드리 업체가 있다. 문제는 현재로서는 SMIC의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이 현재 5%도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SMIC와 TSMC의 기술 격차는 적게 잡아도 3년이다. SMIC의 파운드리 공정 수준은 2020년 상반기 기준, 14 nm가 한계인데, 이미 이 공정은 TSMC가 2017년부터 양산에 투입해 온 공정이다. TMSC와 삼성은 현재 7 nm 팹, 앞으로는 5 nm, 그리고 선행 기술로는 3 nm 팹 공정을 개발하고 있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상황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반도체 기술 굴기를 위해서라도 더 막대한 투자를 SMIC의 차세대 패터닝 설비 확충과 이후 세대의 기술 선진화에 쏟아부을 것임은 확실하다. 중국 정부는 2025년까지 자국 생산 반도체의 비중을 70%로 올리려는 목표를 천명한 바 있는데, 2020년 현재, 그 수준은 그에 한참 못 미치는 15%에 불과한 상황이다. 현재 SMIC가 화웨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 정도로, SMIC의 파운드리 물량은 향후 3년 간 매년 2배 이상씩 증가해야 겨우겨우 화웨이의 현상 유지가 된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투자 집중화를 가속시킬 것이고 자립화 목표의 달성 시점을 오히려 더 앞당길 가능성도 있다. 막강한 규모의 투자를 앞세워, 설비 확충과 더불어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기술 인력들에 대한 스카우트 시도가 더욱 노골화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가 뒤에 있는 화웨이와 SMIC의 막대한 투자는 2021년 하반기까지는 10 nm 수준의 패터닝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SMIC가 TSMC와의 꾸준한 협력이 가능하다는 조건이 만족될 경우에만 유효한 시나리오다.


사실 SMIC와 TSMC의 관계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두 회사의 창업자는 미국에 있을 때 같은 반도체 회사인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Texas Instruments, TI)에서 오래 근무했었고, SMIC의 창업자가 TSMC의 창업자 밑에서 오랫동안 부하 직원 격으로 수련을 받았던 전력이 있다. TSMC는 1987년, 모리스 창 (장중머우 (張忠謀), 1931년생)이 설립했고, 그는 2018년까지 TSMC의 회장을 역임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SMIC의 창업자 리처드 장 (장루징 (張汝京), 1948년생)은 TI 퇴직 후, 2000년, 마침내 SMIC (중신궈지, 中芯國際)를 설립하면서 거점을 대만에서 중국으로 옮겨 거액의 투자를 유치한 후 중고 파운드리 장비를 저렴하게 인수하여 마침내 본격적인 웨이퍼 생산에 돌입했다. 이후 SMIC는 공격적인 투자와 경영 전략으로 마침내 중국 1위의 파운드리 업체로 등극할 수 있었다. SMIC는 사세의 확장 과정에서 경쟁 관계에 있던 TSMC와의 차별 전략을 위해, 파운드리뿐만 아니라, 로직 IC, 시스템 반도체, DRAM에까지 사업 영역을 넓혀 갔다. 사실 SMIC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했던 것은 장 회장의 로비 능력과 더불어, 기술 굴기를 표명했던 중국 공산당 정부의 밀어주기, 그리고 관치 금융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9년, TSMC가 SMIC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으로 TSMC는 SMIC의 지분을 인수하여 SMIC의 2대 주주로 올라서는 과정에서도, 장 회장은 중국 정부에 로비를 하여, TSMC가 SMIC에 대해 대주주로서의 경영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정부 펀드 (중국투자) 3억 5000만 달러 투자를 유치했고, 1대 주주가 된 중국투자는 2억 5000만 달러를 추가로 끌어들여 2대 주주가 되었는데, 이로써 SMIC는 사실상 중국의 국유 기업이 되었다. 겉으로만 보면, 이런 전력이 있기 때문에, TSMC는 SMIC를 굉장히 견제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두 회사는 전략적 공생관계였다. 어차피 파운드리는 TSMC가 월등한 퀄리티를 자랑하니, 상대적으로 저가의 제품 파운드리에 SMIC가 집중하는 대신, SMIC는 반도체 칩의 자체 생산과 영역 확장에서 다시 TSMC에 대해서는 주요 고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웨이가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되던 2019년 상반기에, 그 대처에 대해 다소 자신감을 보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TSMC가 우선적으로 SMIC에 파운드리 물량을 확보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덕분에 화웨이는 적어도 1년 이상은 버틸 수 있는 물량을 확보하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미국의 제재 때문에 TSMC가 눈치를 보며 SMIC와 거리를 벌리고 있는 모양새이지만, 미국의 제재가 느슨해지면 언제든 두 회사는 다시 원래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돌아갈 수 있고, 더구나 같은 (대) 중화권의 문화적 배경, 양사의 인적 구성을 고려하면, 더 끈끈한 결속력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TSMC가 언제든지 중국의 파운드리 산업을 음으로 양으로 되살릴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SMIC가 정말 중국 반도체 굴기의 한가운데에서 중국의 버팀목이 되어줄지 여부는 아무도 모르지만, TSMC가 SMIC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직간접적인 관계를 이어 나가는지를 보면 조금씩 큰 그림이 드러날 것이다.


2.5. 초극미세 패터닝 공정이라는 통곡의 벽

중국의 야심 찬 반도체 기술 굴기 국면은 미국의 제재 조치 현실화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계획이 그대로 현실화되는 것에는 거대한 기술적인 장벽이 있다. 10 nm 이하부터는 전혀 다른 게임이 되기 때문이다.


반도체 공정에서 말하는 패터닝 (patterning)은 말 그대로 반도체 표면 위에 2차원 혹은 3차원 구조로 아주아주 작은 각종 패턴을 새겨 넣은 공정을 의미한다. 이미 기본 원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이제는 반도체 공정에서 말하는 패터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꽤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교양 수준으로 알고 있는 대부분의 패터닝 공정은 이제는 현업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일부 실험 용, 혹은 성능이 아주 뛰어날 필요가 없는 범용 반도체 소자 제작 용도 정도로 쓰인다. 그렇다면 요즘 각광받고 있는 10 nm 이하급, 즉, 7, 5, 심지어 3 nm급 반도체 로직 패턴들은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있을까? 적어도 현시점에서 인류가 보유하고 있는, 웨이퍼 단위로 양산 가능한, 가장 극미세 패터닝 기술의 핵심은 EUV (extreme ultraviolet) 패터닝이다.


보통 반도체 패터닝은 기본적으로 매우 품질이 높고 신뢰도가 높은 광원이 필요하다. 미술 시간에 석판화 (리소그래피, lithography)를 실습해 본 사람이라면 기억나겠지만, 석판화에서는 아라비아고무 용액 같은 특수한 용액을 특정한 기판 (주로 알루미늄 판)에 뿌리고, 그 위에 직사각형 형태의 체에 원하는 밑그림을 그린 후, 햇빛에 노출시켜 원하는 그림이 그대로 아라비아고무 용액에 전사되게끔 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아라비아고무 용액 중 선택적으로 굳은 부분만 남기고 씻어 내면 (이를 에칭 (etching)이라고도 한다) 판화가 완성되는 식이다. 원리만 따진다면 반도체 공정의 패터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라비아고무 용액 역할을 하는 감광액 (포토레지스트 (photoresist))와 햇빛 역할을 하는 특정 파장을 갖는 고품질의 광원이 필요하다. 이때, 햇빛처럼 넓은 스펙트럼 전체를 광원으로 사용할 경우, 파장에 따라 물질이 전자기파를 흡수하는 정도가 달라지므로, 반도체 공정에는 다 파장 광원은 활용할 수 없고, 따라서 아주 좁은 범위의 파장, 특히, 가급적 단파장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레이저 광원이나, 플라즈마 (plasma) 발광 같은 특수한 광원이 필요하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는 20-50 nm급의 패터닝만으로도 반도체에 대한 산업적인 수요를 감당할 수 있었고, 이에 대응하던 패터닝 기술은 주로 과거의 포토리소그래피 (photolithography)를 위시로, 전자빔 리소그래피 (E-beam lithography)와 심층 자외선 리소그래피 (Deep UV lithography, DUV)이었다. 그렇지만, 2010년대로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칩 하나가 처리해야 하는 데이터의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고, 특히 4G, 5G 통신 기술에서 다루는 데이터 용량의 급증 (특히 고해상도 동영상과 가상현실 계산 처리 등)은 더더욱 고속, 안정성, 저전력, 무결점, 고수율 GPU, CPU, AP 등에 대한 수요의 폭증세를 불러왔다. 과거 반도체 업계의 금과옥조처럼 여겨졌던 ‘무어의 법칙 (Moore’s law)’은 더 이상 예전처럼 멱함수 법칙 (power law)을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지만, 대용량 정보의 고속 처리에 대한 수요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더 강력한 반도체 칩에 대한 기술적 요구는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보통 반도체 CPU 등의 칩에서 패터닝을 통해 먼저 만드는 패턴은 제일 간단한 종류지만, 제일 중요한 패턴이기도 한 line-and-space pattern (혹은 나노 회절격자 (nano grating pattern))이다. 겉모습만 보면 젓가락을 수백, 수천 개를 한 방향으로 완벽하게 나란히 간격 맞춰 정렬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물론 젓가락 하나의 폭은 이제 나노미터 수준까지 내려와야 대용량 정보 처리에 대한 수요에 대응할 수 있다. 젓가락의 폭, 혹은 ‘선폭’이라고도 불리는 패터닝 특정 크기는 반도체 패터닝에서 활용하는 광원에 따라 달라진다.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머리를 더욱 세밀하게 빗질할 수 있는 것처럼, 광원 역시 더 짧은 파장을 활용하면 더 촘촘하고 세밀한 패터닝이 가능하다. 선폭이 좁아지면 그에 비례하여 동일한 면적에 새겨 넣을 수 있는 선들의 개수는 더 많아지며, 따라서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시킬 수 있고, 따라서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따라서 원리적으로는 반도체 패터닝 과정에서 선폭을 좁히고 싶다면, 더 짧은 파장을 활용하면 된다. 물론 더 높은 굴절률의 렌즈 재료를 사용하여 numerical aperture (NA)를 높이는 방법도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DUV 리소그래피의 경우, 패터닝에 활용한 광원은 KrF (불화크립톤) 혹은 ArF (불화아르곤) 엑시머 레이저 (Excimer laser)다. KrF 레이저는 248 nm, ArF 레이저는 193 nm의 파장을 갖는다. 광원과 더불어 이와 짝을 이룰 수 있는 감광액, 즉, 포토레지스트가 필요하고, 작년 이맘때 일본의 소재-부품 관련 수출 규제로 한창 나라 안팎이 시끄러웠던 시절, 큰 이슈가 되었던 소재 중 하나도 바로 이러한 엑시머 레이저 패터닝 용 감광액이다.(실제로는 지난 2019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 이후에도 한국의 DUV 감광액 대 일본 의존도는 생각보다 높지 않아서 큰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이들 광원에 의존한 DUV 리소그래피 기반 패터닝 역시, 급증하는 대용량 고속 정보 처리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고, 따라서 더 짧은 파장의 광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extreme UV (EUV)라는 광원이다. 이 광원의 파장은 이제 100 nm보다 한참 밑인 13.5 nm까지 내려온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ArF DUV의 193 nm 파장 대비, 선폭을 1/14까지도 줄일 수 있으니, 굉장한 기술적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동일한 웨이퍼 위에 196 (=14^2) 배나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제작할 수 있으니, 성능도 200배가 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정도 파장 대역의 초단파 전자기파는 대부분의 물질에 잘 흡수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애써 EUV 광원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이들이 진행하면서 주위 물질, 가스, 기판, 기기 내벽 등에 대부분 흡수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EUV 리소그래피부터는 DUV까지 채택해 오던 노광 공정 아키텍처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아키텍처를 선택한다. 방식은 굉장히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이루어진다. 일단 광원 역할을 하는 소재를 외부에서 미세한 크기의 방울 형태로 떨어뜨린다 (초당 수만 번, 그림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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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극자외선 (EUV, extreme UV) 기반 극초미세 패터닝용 노광 공정의 원리


이때 사용하는 재료는 주석 (Sn)이다. 이 미세한 (주로 마이크로미터 (10^-6 m) 스케일) 주석 방울에 이산화탄소 레이저에서 나온 초강력 펄스 (pulse) 형태의 전자기파가 부딪히면 순간적으로 Sn은 여기 된 (excited) 플라스마 (plasma)를 만들어 내고, 이 플라즈마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다시 특정 파장의 전자기파를 방출하면서 흩어진다. 플라즈마의 발생 효율을 높이고, 결함을 제거하며, EUV 광원 수율을 높이기 위해, 노광 장비 내부는 높은 진공도를 유지하되, 플라즈마 발생 부분만 플라즈마 흩어짐을 제어하기 위해, 미세하게 조정한 압력의 순수 수소 가스를 채워 넣는다. 마이크로미터 수준의 Sn 방울을 사용했을 경우, 플라즈마 발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그 특정 전자기파의 파장이 바로 13.5 nm 정도 되는 EUV 파장이고, 당연히 DUV에서 사용하던 엑시머 레이저와는 달리 다소 파장 변동 범위가 있다. (대략 5-7% 정도로 알려져 있다.).


2.6. EUV용 광학계라는 또 다른 기술의 장벽

이렇듯 EUV용 광원을 만들어내는 과정만 봐도 엄청나게 고난도로 보인다. 그런데, 사실 거대한 기술의 장벽은 또 있다. 애써 만들어낸 EUV 광원에서 나온 초단파장 전자기파를 무사히 한 곳으로 집광시켜 반도체 기판으로 보내야 하는데,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EUV는 대부분의 물질에 잘 흡수되므로, 반도체 기판으로 가기도 전에 많이 손실된다. 대부분의 광원이 손실된다면 얼마나 큰 낭비가 되겠는가. 따라서 가급적 EUV가 발생한 기기 내부는 마치 놀이공원에 있는 거울의 방처럼, EUV를 잘 반사할 수 있는 형태로 설계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아무리 정밀하게 가공된 거울이라고 해도 EUV를 너무나 잘 흡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거울이 아닌, 인공적인 거울을 쓴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분산브래그반사판 (distributed Bragg reflector (DBR))이라고 부르는 광학소재다. DBR은 마치 이탈리아의 전통 요리 라자냐처럼 생겼다. 즉, 밀가루와 토마토소스가 한 층씩 번갈아 가면서 켜켜이 쌓인 것 같은 구조인데, DBR 거울은 밀가루와 토마토소스 대신, 고-굴절률, 저-굴절률을 갖는 두 종류의 광학 박막을 번갈아 가면서 쌓는다는 것이 다르다. EUV의 경우, 최대한 반사율을 높이기 위해 최적으로 선택된 재료의 조합은 몰리브덴 (Mo)과 실리콘 (Si)이다. 이들 각각을 수-수십 나노미터 두께로 한 층씩 아주 정밀하게 쌓으며 (사실 이 과정에서 DBR의 품질이 갈린다고 볼 수 있다.), 총 40-50층 정도의 층수를 갖게끔 쌓는다. 계산 포토닉스 방법 중에, 전이행렬방법 (transfer matrix method (TMM)) 혹은 산란행렬방법 (scattering matrix method (SMM))이라는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은 맥스웰 방정식 (Maxwell equation)을 각 층의 경계마다 행렬 형태로 깔끔하게 계산하여, 이들이 연결된 거대한 지배 편미분 방정식을 수치해석 방법을 통해 해를 구하고, 이를 통해 반사율과 투과율, 흡광률을 계산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활용하면 몇 층을 몇 나노 두께로, 그리고 각 층은 어떤 굴절률을 갖게끔 쌓아야 할지를 고려하여 DBR에 대한 최적화 설계를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이렇게 복잡한 구조의 인공 거울을 활용해도 여전히 EUV 전자기파는 너무나 물질과 상호작용을 잘한다는 것이다. Mo/Si 소재의 나노구조 DBR을 활용한다고 해도 EUV는 이 거울에서 한 번 반사될 때마다 무려 30-40%씩 흡수되거나 산란된다. 한 번 DBR 표면에 반사될 때마다 EUV는 대략 35% 정도 흡수된다고 가정해 보자. 보통의 EUV는 아무리 최적 설계를 해도, 만들어진 EUV 광원을 원하는 방향으로 집광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6개의 거울에서 반사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6개의 거울을 거친 후, 남은 EUV 광원의 세기는 0.656 = 7.5%에 불과한 수준이 된다. DBR 거울을 7개, 8개를 쓰는 경우에는 이제는 그 강도는 1% 수준까지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전 세대 리소그래피 광원인 DUV의 경우, 반사율을 거의 90%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EUV 광원의 손실률은 이전 세대의 광원과 비교했을 때 큰 문제점이 되는 요소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DBR를 활용하여 최대한 손실 없이 EUV를 모으는 수 밖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


사실 DBR을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해도, 이론적인 반사율 65%는 달성하기 쉽지 않다. 라자냐를 완벽하게 만들기가 어렵듯, 몰리브덴과 실리콘을 번갈아 가면서 쌓는 과정에서, 두께의 편차가 누적될 수 있다. 계면이 옹스트롬 (Angstrom, 0.1 nm) 수준에서 울퉁불퉁할 정도로 초정밀이라고 해도, 40층 이상 쌓으면 이제는 편차가 계속 누적되어 나노미터 수준까지 표면이 울퉁불퉁해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울퉁불퉁한 표면이나 계면에서 단파장의 전자기파가 깔끔하게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흡수되거나 비탄성 산란 (inelastic scattering)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탄성 산란은 전자기파가 물질을 만났을 때 열 등으로 소실되는 주요 메커니즘 중 하나이고, 따라서 패터닝 공정 엔지니어링 입장에서는 에러의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광원 에너지의 낭비요소이기도하기 때문에,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결함이다. 그렇지만, 나노미터 수준으로 표면을 평탄화하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간신히 옹스트롬 수준에서 표면/계면의 퀄리티를 정밀하게 제어한다고 해도, 40층의 DBR를 완벽하게 매끈한 표면과 계면을 갖게끔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허블 우주망원경에 들어갔던 주 반사경보다 훨씬 정밀한 수준의 초정밀 가공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실상은 DBR 반사율 50%를 유지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이 경우 6개 DBR에 의해 EUV가 순차적으로 반사될 경우, 0.56 = 1.5%, 8개의 DBR를 사용하는 경우라면 0.39% 수준까지 광원 세기가 급감한다.


결국 이전 세대 광원에 비해 광원 생성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 EUV 기술의 현실이다. 이는 소모되는 에너지 단위로 환산하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반도체 패터닝에 활용될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 밀도를 유지하기 위해 1대의 EUV 광원 생성 과정에 얼마나 많은 전기가 필요할까? 200W급 EUV를 기준으로, 대략 500-600 kW나 소모된다. 공장 전체가 소모하는 전력이 아니다. 단 1대의 EUV 노광 장비의 광원 생성에 이 정도의 전기가 소모되는 것이다. DUV의 경우, 필요로 하는 전력은 불과 50 kW 이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광원 생성에만 이전 세대에 비해 무려 10배 이상의 에너지가 요구되는 것이다. 물론 이 마저도 최대한 낮게 잡은 수준이고, 공정의 최적화와 고품질, 그리고 안정적인 생산 속도의 유지를 위해서는 1 MW까지도 소모 전력이 잡힐 수도 있다. 보통 반도체 패터닝 라인 하나에 이런 EUV 노광 장비가 적어도 10대가 들어 가야 하니, 공장 하나가 홀로 10 MW의 이상의 전기를 소모할 수도 있는 셈이다. 이는 소형 화력 발전기 한 개의 발전 용량과 맞먹는 규모다. 이렇게 엄청난 전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생성된 광원의 세기는 200 W 수준에 불과하니, 에너지 효율은 0.04% 밖에 안 된다. 효율 관점에서만 보면 EUV는 실로 처참하다고 할 정도의 기술이다. 만약 누군가 EUV와 성능은 비슷한데, 소모 에너지를 1/10 수준으로 줄여서 에너지 효율을 1%에 가깝게만 만들어도 시장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EUV 광원은 이미 DBR 위에 밑그림이 코팅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그 광 밀도 분포가 사전에 패터닝된 상태가 되고, 따라서 이제 패터닝하고자 하는 반도체 기판에 입사되면 자동적으로 패터닝이 시작된다. 물론 그 ‘밑그림’을 그리게 할 수 있는 특수한 화학 물질이 필요하며, 이 역시 기술적으로 초고순도 제어라는 매우 큰 장벽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화학회사 스미토모 (Sumitomo Chemical)가 대표적인 ASML의 EUV용 포토레지스트 파트너사다.).


2.7. ASML이라는 슈퍼을

현재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세밀하고, 양산도 가능한 반도체 극초미세 패터닝은 바로 이 EUV 리소그래피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13.5 nm 파장의 EUV는 이론적으로 로직 소자의 경우, 3 nm급 (DRAM에서 활용되는 회로의 line-and-space pattern의 물리적 크기로 환산하면 5-9 nm급에 해당한다.) 전후의 극미세 스케일의 물리적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되고, 실제로도 구현되고 있는데, 그 구현 수준을 양산 단가를 맞추면서까지 극한으로 밀어 부칠 수 있는 회사는 전 세계에 채 5개도 안 된다. 사실, 개수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수준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EUV 패터닝 기술을 이용하여 안정적으로 웨이퍼 단위로 팹을 할 수 있게끔 반도체 업체의 라인에 연간 수백 기씩 공급할 수 있는 회사는 네덜란드의 ASML이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2019년 기준, 전 세계 EUV 시장에서 ASML가 차지하는 점유율은 85~90% 수준이다. 나머지 10% 정도가 일본의 캐논 (Canon)과 니콘 (Nikon)이 간신히 파이를 나눠 가지고 있으나, 이 마저도 가격 경쟁력이 없어서 니콘 같은 경우는 오히려 패터닝 기술 개발 인력을 최근에 대량으로 구조 조정하기도 했다. 캐논의 사정도 니콘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수준까지 만드는 것과, 그것을 글로벌 수준의 파운드리 업체나 반도체 회사에 신뢰도 유지하면서 납품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되는 초격차를 가진 회사는 현재로서는 네덜란드의 ASML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ASML이 슈퍼’을’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상 부르는 것이 값이며, 그 마저도 수요가 폭증하고 있기 때문에 주문이 한참 밀려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수백 개의 협력사 중에, ASML만 상대하는 박사급 전담팀이 따로 있을 정도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현시점에서 납품되는 ASML의 EUV 장비의 모델명은 NXE:3400B인데, 이 장비 한 대의 가격은 원화로 대략 1,500~1,600억 원 정도 한다. 이 가격이 실감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이 한창 실전 배치하고 있는 대표적인 5세대 스텔스 전투기인 미국 록히드마틴의 F-35A의 대 당 가격이 대략 1,000억 원이다. 여기에 각종 옵션을 붙이면 대략 1,500억 원 정도 한다. 즉, 대략적으로만 따졌을 때, ASML의 EUV 노광 장비 한 대의 가격이 F-35A 한 기의 가격과 맞먹거나 더 비싼 셈이다. 그런데 반도체 라인에는 노광 장비가 한 대만 배치되지 않는다. 장치 산업의 특성상, 라인 하나에 최대한 집약적으로 장비들을 배치하여 한 배치 (batch)에서 나오는 웨이퍼의 수율 관리를 최상위 수준에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라인 하나에는 10개 이상의 노광 장비가 들어간다. 만약 라인 하나에 10 대 정도의 리소그래피 장비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리소그래피 장비만 물경 1조 5천억 원을 차지하는 것이다. 가히 반도체 산업이 왜 치킨게임으로 흐르면 한쪽이 처절하게 망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돈 놓고 돈 먹기 싸움으로 흐르는지가 여실히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원천 기술과 수율 관리 기술력은 기본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마저도 돈은 달라는대로 주겠다고 외치는 중국 기업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격은 앞으로 더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차세대 EUV 장비인 ASML의 NXE:5000의 경우, numerical aperture (NA)가 기존 장비 대비 50% 이상 증가할 것이고, 그로 인해 대 당 가격은 최대 3배 이상 폭증할 것으로 보이는데, 무려 4,000-5,000억 원 수준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되며, 따라서 라인 하나에 들어가는 노광 장비에만 투자되어야 하는 비용은 최대 5조 원까지도 이를 수 있다.


가격이야 어떻게 되든, 대용량의 데이터를 고속으로 안정적으로 정확하게 처리하려면, EUV에 의존하는 극초미세, 즉, 5 nm 이하 급 패터닝 기술은 이제 필수적인 기술이 되었다. 따라서 전 세계 반도체 회사는 앞으로 적어도 10-20년 이상은 ASML이 어떤 기술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방법밖에는 없다. ASML은 한 번 파트너십을 맺으면 꽤 오래 그것을 유지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대표적인 파트너십이 독일의 렌즈 회사 칼자이쯔 (Carl Zeiss)와의 파트너십이다.), 그 덕분에 삼성전자 같은 경우는 ASML을 슈퍼’을’로서 인정도 하지만, ASML에 삼성전자 초미세 패터닝 공정에 특화된 옵션을 공격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온 몇 안 되는 갑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폐쇄된 클럽에 화웨이가 거의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상 들여놓은 상태였다.


문제는 작년 11월, 트럼프 정부의 대 중국 견제 정책의 일환으로, 사실상 중국 공산당 소유 기업이나 마찬가지인 화웨이에 대한 제재가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는 점이다. 지난 6월에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 (FCC)가 화웨이를 미국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공식 지정’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반도체 소재, 공정, 장비 기업들은 화웨이를 포함한 중국의 주요 반도체 업체로의 수출이 미국 연방법에 의거하여 원천 금지되었다. 네덜란드 기업인 ASML은 이 정책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900-1,000여 개에 달하는 EUV 장비의 부품 중, 대략 20-30% 정도가 미국에 있는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ASML도 대중국 노광 장비 수출이 제한되었다. 화웨이 입장에서는 제재 전에 들여온 노광 장비가 사실 상 마지막인 셈이다. 이것으로 앞으로 최대 1-2년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급변하는 세계 반도체 기술 시장에서, 2년 이상의 격차는 거의 따라잡을 수 없는 초격차로 그대로 이어진다. 돈다발을 아무리 싸 들고 사정을 해도, 시장이 열리지 않으니 중국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는 반도체 공정에서 가장 중요한 패터닝에 대한 자국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며칠 전 중국 정부는 점점 조여 오는 미국의 대중국 제재 국면에 맞서, 첨단 기술의 자립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고, 그 프로젝트를 ‘난니완(南泥湾)‘ 프로젝트라고 명명하였다. 1930-40년대 항일전쟁 당시, 중국 동부 산시성 난니완 협곡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 팔로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험한 산지를 개간하면서 장기간 게릴라전으로 항전하며 버텼던 역사를 기려, 아마도 난니완이라는 지명을 프로젝트 명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중국은 미국의 대 중국 첨단 기술 제재에 대해 자국 주도의 기술 개발 의지를 임전무퇴, 결사항전의 각오로 천명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10 nm 이하 급, 향후, 5 nm 이하 급 극초미세 패터닝 기술이 그렇게 정부 차원의 머리띠 두른 결사항전 의지와 수십 조 규모의 돈만 있다고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잠깐 설명했지만, 단순히 광원을 만드는 과정부터가 굉장한 기술적 난이도를 보이고 있으며, 광원을 유도하는 반사경 제작 역시 극심한 기술적 난이도를 자랑한다. ASML은 이 부분에 대해 이미 유럽 내 수십 개의 파트너사들과 수십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굳건한 기술적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고, 각 파트너사는 해당 분야의 업력이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안정적인 기초 연구개발, 선행 연구에서 비롯되는 기술의 축적, 그리고 기술에 대한 상호 신뢰 관계가 없으면 절대 형성될 수 없는 뿌리 깊은 기술 기반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중국 정부의 안일함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이 극초미세 패터닝 기술 역시, 몇 년 전 LCD 케이스처럼 외국의 기술을 사 오거나 (혹은 외국 기업의 특허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합작사의 IP를 강탈까지 하고), 입도선매식으로 스카우트해 온 외국 경쟁 업체의 엔지니어들로부터 기술적 엑기스만 뽑아내는 방식으로 돈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 정부가 인내심을 가지고 ASML이 그랬던 것처럼 수십 년에 걸쳐 이런 류의 기술적 생태계를 (그것도 사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이룬) 이룰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그렇게 장기간을 버티면서 기술적 생태계를 이루는 동안 다른 나라의 반도체 기업들, 소재/장비 기업들은 가만히 있을 리도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2.8. 중국의 초극미세 패터닝 기술 자립은 가능할 것인가?

중국 공산당 정부 입장에서는 어쨌든 자국에서의 반도체 산업, 그리고 그 이후의 지식 경제 산업을 지속적으로 국가 기간산업으로 반드시 육성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자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기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반도체 패터닝 기술은 그 최고 수준이 현재의 EUV는커녕, DUV를 넘는 것조차도 어려울 것이라는 점, 따라서 가격 경쟁력은 물론, 기술적 경쟁력도 한참 선진 수준에 뒤떨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EUV가 없으면 10 nm 이하로 패터닝 정밀도가 높아질 수 없는데, 현재 14 nm 공정이 최선의 수준인 중국의 파운드리 업체 SMIC가 아무리 인력과 기술을 쥐어짜더라도, 세상에 없던 EUV를 갑자기 뚝딱 만들어낼 수는 없다. 광원과 광학계, 공정 최적화 기술과 펠리클, 마스크 제작 기술 등은 하루아침에 기술 생태계가 뚝딱 만들어져서 수율을 맞출 수 있는 성질의 기술이 아니다. 결국 SMIC는 투자는 쌓이지만, 그 돈으로 반드시 사 와야만 하는 ASML의 EUV를 아무리 해도 살 수 없으니, 그 대체재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문제는 EUV의 대체재라고 할 만한 기술이 딱히 없다는 것이다. 10 nm 선에서 멈춰 선, 그나마 수율 보장도 안 되는 SMIC 칩으로 화웨이가 몇 년을 더 버틸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결국 미국 중심의 반도체 기술 로드맵은 계속 3 nm, 2 nm, 심지어는 원자 단위를 논해야 하는 1 nm 수준으로까지 계속 내려가고 있을 때, 화웨이와 SMIC는 여전히 두 자릿수 나노미터에서 멈춰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상태로는 아무리 돈방석에 앉은 거대 공룡 화웨이라고 해도, 그리고 TSMC의 핵심 기술 인재를 영입한 SMIC라고 해도 5년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5년이면 반도체 장비 특성상, 이미 노후화가 될 대로 된 상황일 것이므로, 장비 성능 저하로 인한 반도체 칩 수율 관리는 더 안 좋게 흐를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중국 내수만으로도 웬만한 기업들은 수익이 유지 가능하고, 어차피 만들어 봐야 미국의 제재 때문에 주요 국가로는 수출도 안 되니, 아예 독자적 로드맵과 규격을 채택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 경우, 결국 중국은 거대한 갈라파고스처럼 변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의 유명했던 전자 및 반도체 회사들이 한창 잘 나가다가, 몇 번의 표준화 실책과 이전 세대 기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 끝에 결국 갈라파고스처럼 변하여 많은 회사들이 망하거나 인수 합병되고, 결국 시장에서 사실상 전부 밀려나버린 사례가 중국의 반도체 업계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같은 갈라파고스라고 해도, 중국과 일본의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 내부에서의 제로섬 게임의 영향만 놓고 보면, 일본은 그래도 개방된 상태였지만, 중국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폐쇄된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본격적으로 글로벌화된 이후, 지금까지 기술이나 시장의 갈라파고스화는 대부분 망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오고 있다. 초기의 상태가 아무리 선진적이었다고 해도, 시장 규모가 제일 거대했다고 해도, 기술 흐름의 대세를 놓치거나 무시하고, 독자적 표준만 밀어붙이며, 기술개발에만 치중한 나머지 마케팅의 혁신을 소홀히 하고, 가격 경쟁력을 국가가 관여하는 방식으로 조작하거나 우회하려 했던 대부분의 기술 개발 및 상업화 사례들은 결국 갈라파고스화의 경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로 해 누적된 재정적자를 감당하지 못 한 나머지, 정부가 백기를 드는 순간, 버티고 있던 회사들은 인공호흡기를 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는 식이었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과연 갈라파고스의 궤도를 따라갈지 여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미국의 대 중국 첨단 기술 품목 수출 제재가, 비단 트럼프 정권뿐만 아니라, 차기 미국 정권이 바뀌는 것과 상관없이, 초당적인 기조로 계속 유지될 것임을 고려컨대, 아마도 앞으로 이 제재는 상당 기간 오래 유지될 것이고, 이로 인해 중국은 결국 독자 기술 규격과 로드맵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여 독자 노선을 이끌고 갈 가능성이 높다. 아마 이 과정에서 중국 시진핑 정부가 오랫동안 공들였던 일대일로의 유효성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산업 기반 시설만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표준 규격, 로드맵에 편입될 것인지를 일대일로에 참여한 나라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차관 혜택을 유리하게 해 주는 대신, 반도체 기술 규격을 중국의 것으로 채택하게끔 강요할 가능성이 표면 위로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2.9. 중국의 반도체는 갈라파고스의 공룡이 될 것인가?

이 반도체 기술 전쟁의 국면이 어떻게 흘러 가든, 다음 세대의 반도체 로드맵은 두 평행 세계가 공존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렇게 규격이 갈라지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비슷한 것처럼 보였던 기술들도 결국 점점 그 메커니즘이 분화되어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섬에 고립된 새가 세대가 지나면서 그 섬에만 있는 토착종이 되어 고유한 부리를 갖는 종으로 진화하는 것처럼, 중국 (그리고 친 중국 국가들) vs. 나머지 세계의 구도로 반도체 기술도 각자의 길로 진화를 거듭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세대가 지날수록 이제 이 차이는 마치 종간 번식이 거의 불가능한 새들의 상태가 되는 것처럼, 기술적으로 완전히 달라진, 즉, 호환이 불가능한 시스템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거칠게 말하자면 철기시대와 석기시대가 공존하는 것과 비슷한 양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반도체 분야의 표준과 로드맵뿐만 아니라, 반도체가 산업의 쌀로써 활용되는 거의 산업 전 분야로까지 확대될 수밖에 없는 산업적 연결 고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즉, 전혀 호환이 안 될 정도로) 기술적 분기가 심화되는 상황이 수십 년 간 지속될 것으로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미국이 마음먹고 2인자를 죽이려고 들면 얼마나 철저하게 죽일 수 있는지, 우리는 지난 100년 간 2차 대전 시기 나치 독일, 냉전 시기 소련, 버블 시기 일본의 케이스, 그리고 21세기 중국의 케이스에서 계속 관찰해 오고 있지 않은가? 중국이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전문가들이 다양한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결국 그 나라의 경쟁력은 기술적 혁신과, 그를 뒷받침하는 기초 과학 연구의 저변과 역사에서 나온다는 단순한 원리를 고려하면, 독자 노선을 택하게 될 중국은 중단기적으로는 엄청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시기를 넘길 수 있는 정치적 안정성과 체력이 있다면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표준과 로드맵을 자국으로 다시 되찾아 올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 기준이 정확히 언제쯤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두 세대 (50-60년) 정도 이내에서 그 윤곽이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 그 안정성과 체력이 뒷받침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흐름은 더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이대로 중국이 자국의 기술력으로 10년 정도 버티게 되면 어떻게 될까? 반도체 기술의 세대 차이는 벌어질 대로 벌어지게 되고, 반도체 기술의 특성상 이제는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그것을 따라잡기 거의 불가능해진다. 여기서 중국 정부가 만에 하나 미친 짓을 한다면, 그것은 대만에 대한 강제 무력 합병과 이후 TSMC에 대한 국유 기업화가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을 미국이 그냥 좌시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의 무력 행동은 중국에게 돌이킬 수 없는 미래를 가려다 주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결말이 어떻게 나오든, 미국은 이제 가상의 적이 아닌, 실질적인 주적이자 2인자로서의 중국을 진지하게 누르려하고 있고 (적어도 확실히 여기서 싹을 자를 생각으로 제재의 끈을 놓지 않을 생각인 것 같고), 그중에서도 앞으로의 지식과 정보 기술 혁명에 필수적인 반도체 산업의 싹을 미연에 자르려 하고 있다.


결국 중국 공산당이 꿈꾸는 반도체 기술 굴기는 결국 2020년대의 10년이 고비다. 나라 입장에서는 일단 10 nm 벽을 자국의 기술로 2020년대 중반 이내에 뚫을 수 있느냐가 1차적인 관건이 될 것이고, 만약 그럴 수 없다면 플랜 B로서 아예 다른 개념의 반도체 로직 아키텍처를 기술 갈라파고스화가 되는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시행할 준비가 되었는지가 2차적 관건이 될 것이다. 이 고비를 버티면서 어쨌든 자국 시장 위주로 기술 생태계를 보전하면서 버티면 중국에게 승산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버티기 게임에서 백기를 든다면,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중국 반도체 시장은 마치 소련이 미국과의 무한 군비 경쟁에서 밀려 나라가 흔들리게 된 것처럼 불안정을 겪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제재가 반도체뿐만 아니라 중국산 고부가가치 IT제품이나 드론, IoT, 자율주행차 등으로 점차 확대 적용되기 시작하면, 중국은 그야말로 자국 내에서 제로섬 게임을 하며 스스로의 경제 성장률을 깎아 먹는 방법밖에는 산업을 이어 나갈 도리가 보이지 않게 된다. 산업의 규모를 아무리 키우고 싶어도, 그를 뒷받침할 첨단 반도체가 없다면 산업의 경쟁력은 답보 상태가 되며, 벌어지는 기술 경쟁력은 곧 산업 경쟁력, 가격 경쟁력과 연결되어, 막상 미국의 제재가 풀리는 시점이 도래한다고 해도, 중국 입장에서는 이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재기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추진하는 자력 기술 개발 혹은 신개념 아키텍처 설계와 제조 둘 다 안 통하게 된다면, 중국은 앞으로 50년은 미국에 숙이고 갈 생각으로 백기를 들고 나와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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