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둘째 이모가 사시는 청주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동막골에 갔다. 당시 그곳은 완전히 산골짜기였고, 동네에 15~20여 가구가 살았던 것 같다. 둘째 이모부는 일찍이 돌아가셔서 이모와 사촌 형들만 살고 있었다. 그곳엔 수도가 아직 들어가지 않아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했고, 동네 냇가에서 이모가 빨래를 하시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동네엔 아직 초가집도 있었고, 이모가 부엌에서 나무를 때서 밥을 하시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이모가 해주신 점심을 먹고 나서는 사촌 형들이 무작정 나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나는 아직 너무 어려 산을 타는 것이 힘들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형들 뒤만 따라다녔다. 가을이라 잠자리 천지였다. 한 마리를 잡으면 손가락 사이에 끼고, 또 한 마리를 잡으면 다른 손가락 사이에 끼고 다녔는데, 나중에는 잠자리를 너무 많이 잡아 더 이상 손가락에 낄 수도 없었다. 손가락 사이에 있었던 잠자리를 놔주고 다시 새로운 잠자리를 잡아 다시 손가락에 끼고 그렇게 몇 번을 계속 잠자리를 잡고 놓아주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나게 놀면서 산속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사촌 형들이 이제 잠자리 그만 잡고 밤을 주우러 가자고 했다. 나는 처음에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그때만 해도 너무 어려 산에서 밤을 주울 수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산 어느 지점에 갔는데 형들이 여기서 밤을 많을 주울 수 있다고 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정말 밤송이가 벌어져 있었고 밤송이 사이에는 밤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나는 밤을 그냥 주워도 되는지 잘 몰라 형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주인도 없는 산에서 나는 밤나무라서 그냥 아무나 주우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밤송이도 처음 보았고 밤이 땅바닥에 그렇게 많이 떨어져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형들이 밤송이를 양발로 벌려 밤을 빼내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는 너무 신기해서 형들처럼 떨어진 밤송이에서 밤을 꺼내어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밤송이 안에 있는 밤 말고도 이미 땅바닥으로 떨어져 있는 밤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밤을 줍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하나하나 주울 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았고 신기했다. 밤 줍는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밤송이가 내 머리에 떨어졌는데 진짜 아팠다. 너무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픈 것도 잠시 밤 줍는 재미에 빠져 금방 잊어버렸다. 순식간에 형들이 준비해 간 조그만 가방에 밤이 가득 차 버렸고, 그것만으로도 집에 가져가 온 가족이 먹고도 남을 것 같았다. 밤을 다 줍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10살도 안 되었던 일인데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즐겁고 기분 좋은 추억이었다.
추석 연휴가 끝났다. 오늘 일을 다 마치고 친구들과 산에 올라갔다. 저녁을 먹고 친구 석이와 원호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오랜만에 산에 가서 밤을 줍기 위해 원호 어머니께서 사시는 회인으로 차를 몰았다. 추석이 바로 엊그제였으니 지금 줍는 밤은 맛이 아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요즘 아버지 어머니 입맛이 없으셔서 식사를 잘 못하시기에 이것저것 음식을 바꾸어 드시게 하고 있다. 햇밤을 주워 쪄서 드리거나 삼계탕에 넣거나 생밤이라도 까서 드시면 어떨까 해서 원호에게 추석 전에 산에 가서 밤을 줍자고 얘기했던 터였다.
일과가 다 끝나고 가다 보니 원호네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였다. 주위는 이미 어두웠지만 우리는 후레쉬를 하나씩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산을 조금만 올라갔는데도 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처음에는 큰 것 작은 것 가릴 것 없이 일단 무조건 줍기 시작했는데 나중엔 밤이 너무 많아 작은 것은 아예 줍지도 않고 씨알이 굵고 큰 것만 주워도 다 줍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세 명이 정신없이 밤을 주웠는데 너무나 재밌고 신나는 것이었다. 우리가 다시 10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밤을 줍던 그 기분이 똑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밤을 주울 때의 기분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니 한가위 보름달이 조금 이울어지기 시작했지만 너무나도 예쁘고 둥근달이 두둥실 떠 있었고 가을바람은 선선해 기분마저 상쾌했다. 우리는 어두운 밤중에 모든 것을 다 잊고 후레쉬를 밝히며 정신없이 어린이가 된 것처럼 즐겁게 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어느덧 몸에서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밤을 너무 많이 주워 허리가 아파오고 밤이 너무 많아 집에 가져가도 다 먹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을 한가위 보름달처럼 마음 푸근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이가 들었다고 추억을 만들지 못할 것도 없다. 아름다운 추억은 나이에 상관없이 만들면 되는 것 같다. 오늘 이렇게 재미있게 밤을 주웠던 것도 10년 후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남아 있는 시간을 아름답고 재미있게 보내고 싶다. 가만히 있으면 그 시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노력으로 그 시간을 즐겁고 기억에 남는 시간들로 만들어 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하려 한다. 오늘 만드는 추억이 내일의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주운 밤으로 내일 아침에는 밥에 밤을 넣어 부모님께 해드릴 생각이다. 오늘의 기분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준 친구들이 고맙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