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의 세계

by 지나온 시간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없음의 세계에서 이 세계로 던져졌다.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다시 없음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안다. 그것은 필연이라는 것을. 내가 원하지 않아도, 무섭고 두려워도 이 땅에서 잠시 머물렀으니 조만간 다시 나의 고향이었던 없음의 세상으로 가야만 한다.


작년 여름부터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아버지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병원에 모시고 갔다. 전립선암이었다. 수술을 하고 항암제를 드셨다.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았는데, 아버지는 다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몸에 마비가 왔고 물도 삼키지를 못하셨다. 수술을 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고비를 넘겼다. 어머니 건강 검진 결과가 의심스러워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대장암이었다. 간신히 수술을 했고 항암치료를 시작했으나 부작용으로 어머니는 다시 쓰러지셨다. 항암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년여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두 분을 모시고 운전해서 병원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져서 읽기 시작했다. 암에 대한 것들, 암 환자의 건강관리에 관한 책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있는 정보도 미친 듯이 찾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러한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집도를 해서 수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처방을 내려 좋은 약을 드시게 할 수조차 없었다. 책이나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나의 무능력에 절망스러웠고, 내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냥 다 하늘에 맡겨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나의 생각과 판단을 버렸고, 나의 고집과 아집도 버렸다. 그냥 편안히 두 분이 식사를 하시고 산책을 하시고 대화를 하실 수 있는 것에 만족했다. 그나마 기적적으로 그것은 가능해졌다.


이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이는 것 외엔 더 이상 선택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다만 이 세상에서 두 분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기만을 소망할 뿐이다.


나는 이제 죽음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나도 언젠가는 그 길을 가겠지만 이제는 무섭거나 두렵지 않다. 나의 고향이 원래 이 지구라는 있음의 세계가 아니기에 그렇다. 없음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모르나 그곳으로 가야 하는 것은 운명일 수밖에 없고,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 운명이 언젠가는 나에게 불현듯 찾아오리라는 것을 너무나 확실히 안다.


이 지구 상에서 나의 모습이 어떻든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준 사람은 오직 부모님밖에 계시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을 초월한 그 무엇이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았다. 내가 죽을 때까지 그것을 다시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남아 있는 기간 동안 조건 없이 두 분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분이 어떤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시건 있는 그대로 전부 다 받아들이려 한다.


나는 이 세상에 미련은 없다. 살 만큼 살았고, 경험할 만한 것은 다 경험한 듯하다. 나도 미련 없이 없음의 세계로 언젠가는 당당하게 갈 것이다. 남아 있는 기간이나마 아름다운 시간으로 채워가는 것이 내가 지금 여기 있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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