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자 Sep 10. 2021

이 순간, 친구들과 같이 맞는 비라면

<슬기로운평대생활>15일째

희미한 기억 중에 불꽃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어제 밤바다에서 불꽃을 쏘았던가. 화로에 불을 끄고 뒷정리를 했던 기억은 제법 또렷한데 불꽃놀이의 기억은 가물거린다. 꿈이었나 싶다가 무심결에 들여다본 휴대폰 사진보관함에 막 쏘아 올린 불꽃사진이 하나가 찍혀 있었다. 별 걸 다했었구나. 동심이 되었거나, 이제 동심도 사라졌을 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삶에 대한 ‘브라보’였거나.   

전날 음주량에 비해 숙취가 없었다. 맑은 공기와 바람이 걷어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즐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비 예보는 정확했다. 종일 비가 올 기세였다. 더 자도 될 텐데 모두 부스스 일어났다. 서로 일어나는 기척에 깼다. 게슴츠레 뜬 눈들이 마주치며 웃고들 있었다. 


“비 오는 날은 아이유지.” 


H가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 음악을 틀었다. 아이유의 ‘라일락’이 흘렀고, 우린 노래에 고개를 까딱이며 모닝커피를 마셨다. 막 일어나 조금 몽롱하면서도 개운할 때, 밥을 차리고 먹을 때, 외출하고 들어와 헛헛할 때, 고요함이 문득 낯설어질 때 음악은 그 뻑뻑한 순간을 매끄럽게 해 주었다. 음원 차트 순으로도 듣고, 개별 가수의 곡들도 찾아들었다. 그중 단연 아이유였다. 곡도 곡이지만 목소리의 힘이라 생각했다. 아이유라는 뮤지션을 더 좋아하게 됐다. 


여하튼 일찍, 그것도 멀쩡하게 아침을 시작했다. 좀 마셨다고 늦잠을 자기에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던 것이다.  


“비 오는 날은 숲이지.” 


낭만덩어리 H의 제안으로 ‘머체왓’이란 곳으로 향했다. 돌(머체)밭(왓)이라는 제주말이다. “머체왓”하고 입 안에서 굴려보며, 가본 적도 없는 태국어 같다고 느꼈다. H의 입에서 “이름이 예쁘다”는 말이 나왔다. 그가 수많은 갈 곳 중에 이곳에 끌렸던 또 다른 이유였다. 저 큰 덩치에 여린 감성이 한자리 차지하고 있구나 싶었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언제부터 저랬나.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귀엽기도 했다.         

머체왓 입구에는 본격적인 개방을 준비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H는 오랜 사유지를 개방하는 것 같다고 했다. 들어서는 길에는 엄청난 양의 말똥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시야에 한가득 들어오는 초원은 말이 뛰던 목장인 모양이었다. 숲으로 들어서는 동안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거진 숲은 더 짙고 또렷해졌다. 사람 손을 한참 타지 않은, 원시림 같은 숲은 신비감을 품고 있었다. 이 역시도 비로 인해 강렬하게 느껴졌다. 숲 사이로 난 완만한 경사를 걸어서 오르는 동안 훼손되지 않은 것이 주는 신성하고 건강한 기운에 대해 생각했다.   

빗발이 거세지자,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빼곡한 숲도 역부족이었다. 앞서 걸어가는 두 친구의 어깨 위로 빗방울이 튀었다. 등은 흠뻑 젖었다. 나는 카메라에 물 들어갈까 받쳐 들었던 작은 우산을 접었다. 이 순간, 친구들과 같이 맞는 비라면…. 마냥 같이 맞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내가 괜히 근사해지는 것 같았다. “친구야. 우리 친구 아이가?” 영화 <친구>의 강렬했던 대사가 목구멍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곧고 높이 뻗은 편백나무 숲에 이르자 하나같이 탄성을 내질렀다. 관성이란 건 무섭다. 사진기자들은 이런 걸 못 지나간다. 그렇다고 지긋이 감상하지도 못한다. S와 H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취재하듯 편백나무를 담았다. 내친김에 기념사진도 한 컷 남겼다. 

일종의 직업병인데 머릿속에 스틸 컷으로 한 장면을 고정시키고, 뒤로 물러나거나 5m쯤 머리 위에서 이 스틸 컷을 바라보는 것이다. 중년의 남자 셋이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숲길을 나란히 걸어 올라가는 풍경. 그런 스틸 컷에 ‘중년’ ‘중년 남자’라는 단어를 내세운다면…. 단어가 품은 어떤 편견들이 작용한다면 참 칙칙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배제되고 ‘우정’이라는 단어를 슬쩍 얹어놓는다면…. 참 아름다운 장면이지 않을까. 정말 멋진 자연과 사람이 이루는 풍경이지 않나. 


창밖 빗소리가 자장가로 들렸을까. 비가 만들어내는 작은 진동이 토닥이며 잠을 재촉했을까. 집에 돌아온 우리는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누웠다. 그리고 곤히 잠들었다. 평화롭고 다디단 낮잠이었다. 이 친구들과 언제 다시 이런 낮잠을 잘 수 있을까 생각하다 좀 쓸쓸해지고 말았다.   

마지막 밤의 만찬이 시작됐다. H가 뒤뜰에 비가림 천막을 펼쳐 고정시켰다. 캠핑의자를 놓고 화로에 불을 놓았다. 오후에 세화장에서 산 옥돔과 갈치 등 생선을 구웠다. 아니 튀겼다. 천막과 뜰에 “다다닥” 떨어지는 빗소리와 생선이 “타다닥” 튀겨지는 소리가 조화로웠다. 그 와중에 ‘불멍’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 주는 것 같았다. 모든 감각들이 총동원되어 “좋다, 좋아” 아우성이었다.  


우린, 밤에, 비에, 음악에, 술에, 우정에 취해갔다. /yaja


이전 14화 살며 처음인 것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