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자 Sep 11. 2021

철들지 않고 깊이 나이 들어갈 것이다

<슬기로운 평대생활> 16일째

친구들과 아침산책에 나섰다. 우린 지난밤과는 달리 사뭇 차분했다. 그 괴리가 커서 낯설기도 웃기기도 했다. 이런 진폭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고, 그런 것이 또 인생이리라. 각자 말을 아낀 채 동네를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그 순간, 뭐라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품은 생각도 얼마간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무엇보다 H와 S의 지금 가장 절실한 마음은 명확했다. ‘아, 가기 싫다.’    

둘은 새천년과 21세기가 시작하는 2000년에 각각 다른 신문사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에 입사해 현장에서 ‘동기’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생긴 ‘찐친구’들이다. 20대 후반부터 30대와 40대를 가까이서 지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20년 지기가 되었다. 우리는 일과 회사와 여러 관계와 가정에 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눴다. 속상하고 괴로울 때 가장 먼저 찾아 위로받고 싶은 이들이었고, 좋은 일엔 누구보다 먼저 기뻐해 준 친구들이었다.     


공항 가는 길에 따라나섰다. 표정들이 헛헛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친구들 얼굴에 투영했을 수도 있고, 둘이 내가 짓는 표정을 따라 짓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항공사 체크인 창구로 향하는 걸음이 터덜터덜 무거워졌다. 도착한 날, 내게 오려고 서둘렀던 가벼운 걸음을 상상했다. 짐 부치는 걸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다가, 표정이라는 걸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면 제주공항에 도착하는 모든 이들의 표정의 평균값과 그들이 떠날 때의 표정의 평균값이 얼마나 차이가 날까, 하는 생뚱맞은 궁금증이 일었다. 내친김에 발걸음의 힘과 속도는 또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일 것인가.  


인파 속에 있는 친구들의 내내 바라보는 동안 복잡다단한 감정이 엉겼다. 각각의 감정을 대표하는 수많은 단어들을 한데 섞고 뭉친 다음, 꾹꾹 쥐어짜서 튕겨져 나온 단어는 ‘짠함’이었다. 제주를 떠나는 날의 내 모습을 뒤에서 바라본다면 역시 저런 느낌일까. 만만치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은 비슷하게 짠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출국장으로 들어서던 친구들이 몸을 돌려 나를 봤다. 난 둘을 향해 손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S와 H은 손을 든 채 짧게 포즈를 취했다. ‘쿵’하면 ‘짝’하는 친구들이다.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그 순간에 표할 수 있는 고마움이었다. 평대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자, 허전함이 밀려왔고 좀 쓸쓸해졌다.  

친구들이 제주행 표를 끊었다고 문자를 보냈을 때, 뭘 굳이 오냐고 타박을 했었다. 말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렇게 튀어나왔던 것이다. 난 그런 쪼잔함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난 친구들 덕에 지난 20년을 잘 버틸 수 있었다. 사회생활의 크고 작은 고비의 순간에 이 친구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의 자리’가 가능했을까. 지금 제주에서의 근사한 휴식에도 친구들의 지분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시간에 목말랐다면 두 친구도 다를 리 없다.


지난 사흘은 우리의 현장 20년, 우정 20년을 자축했고 격려한 시간이었다. 이만한 선물이 있을까. 이렇게 특별한 기념이 있을까.    


두 친구는 지금까지의 시간이 나 혼자서 온 게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우리가 함께여서 많은 것들이 가능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을 주고 돌아갔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친구들을 보내고 돌아와 펼친 고 황현산 선생님의 트위터 모음집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내가 살면서 제일 황당한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결혼하고 직업을 갖고 애를 낳아 키우면서도, 옛날 어른들처럼 나는 우람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하고 늘 허약할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늙어버렸다. 준비만 하다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가끔 ‘우리가 철이 들긴 한 건가, 우리가 어른이긴 한 건가’ 싶은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린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평생 갖지 않으면서, 그렇게 철들지 않으면서 더 깊이 나이 들어갈 것이다. 그 길을 같이 걸어갈 친구들이 있다는 건 '정확히' 축복이다. /yaja


이전 15화 이 순간, 친구들과 같이 맞는 비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