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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Sep 14. 2021

일이었을까, 놀이였을까

<슬기로운평대생활>17일째

새벽에 파도소리에 잠을 깼다. 잠을 깬 순간에 파도소리가 들려왔는지도 모르겠다. 바다가 가깝지만 파도소리가 들렸던 적은 없었다. 늘 떠다니는 소린데 내가 감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뒤척이는 바닷소리는 느리고 웅장했다. 귀로 듣는데 눈앞에 펼쳐진 바다가 보이는 듯했다. 까만 새벽에 나는, 잠자리에 누운 채로 대자연의 경외로움에 몹시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바다는 체감하는 바람의 크기에 비해 파도가 거칠었다. 바람이 크게 느껴지는 날 의외로 파도가 차분했던 몇몇 날들이 기억났다. 파도의 조건이 단순히 바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둔하게도 눈치를 챘다. 세상만사가 ‘파도=바람’으로만 간단명료해지면 얼마나 좋겠나 싶다가도 그러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싶기도 했다. 


해안 길가에 서서 바다를 향해 기지개를 켜는데 백사장 위에 거뭇하고 굵은 선이 또렷했다. 가까이 가서 봤더니, 파도에 해초들이 한가득 밀려와 있었다. 어디로부터 쓸려온 것인지 모를 각양각색의 바다 식물들이 백사장을 ‘해조류해변’으로 만들어놓았다. 


비슷한 규모의 파도가 쳤을 때도 이렇진 않았는데, 바다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닷가 마을에 2주가 넘도록 지내면서 깨달은 건, 바다를 짐작하는 일만큼 공허한 건 없다는 것, ‘바다를 안다’는 말은 존재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썰물이 되어 물이 밀려나자, 파도가 밀어붙인 모양대로 해초가 널려 여러 층으로 수를 놓았다. 스스로 존재의 모양을 남기지 않는 파도는 그렇게 모양을 남겨두었다. 파도가 이렇게 밀려왔다가 갔구나 하고 누구나 생각하게 될 흔적이었다. 바다에서 바람과 파도와 해초 등이 각각 특별한 조건과 상태로 만나서 구성해 놓은 설치미술을 보는 것 같았다. 인위가 개입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이었다. 

물에 발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미끌미끌한 해초들이 발목을 휘감았다. 바로 그 순간에 난 창작의 의지가 타오르고 말았다. 이 자연의 그림을 내 식으로 표현해보자는 것이었다. 오늘 일용할 ‘사진놀이’의 발견이었다. 모래사장을 캔버스 삼아 사진을 찍어보기로 했다. 아무렇게나 쌓인 듯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질서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주의 질서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종류의 해초들이 엉긴 채 어울리고 조화로웠다. 빠져들었다. 해초들을 부감으로 내려찍었다. 똑딱이 카메라를 쥔 손이 바빠졌다. 

집에 와서 노트북에 사진들을 띄웠다. 해초가 품은 고유의 색과 빛깔이 잘 드러나도록 밝기를 조절했다. 캔버스가 된 모래의 질감을 조금만 남겼다. 여러 장의 사진을 만들어놓고 한 장씩 넘겨보니, 썩 괜찮은 사진 작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잠깐 혼란스러웠다. ‘이게 사진이다’ 싶을 때 심장이 뛰고 손발이 분주해지는 건 카메라를 업의 도구로 삼은 뒤에 익은 습관이다. 오늘 해초를 찍는 일이 제법 설렜는데, 이 설렘의 정체가 ‘일’의 감각에서 왔는지, ‘놀이’의 즐거움에서 왔는지 헷갈렸다. 후자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했다. 여긴 제주고, 나는 휴가 중이니까. /y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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