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평대생활> 18일째
별채에 머물던 작가 샘이 아침 일찍 서울로 돌아갔다. 그는 한 달하고 보름을 평대에서 지냈다. 전날 마당에서 마주친 샘은 내게 추천해주고 싶은 먹거리, 볼거리가 아주 많아 보이는 눈치였지만, “저는 차가 없어요. 그냥 좀 걸어 다녀요”라는 말에 가까운 맛집 몇 군데를 정성스럽게 알려주었다.
맛집이 있는 종달리에서 일출봉을 지나 광치기 해변까지 걷기로 했다. 종달리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조금 이른 점심을 먹기 전 맛의 감동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약간의 허기가 필요했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식당, 카페, 소품가게 등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올레코스를 따라 들어서 있었다. 참 구석구석 자리를 잡았구나. 서둘러 제주행을 감행한 육지사람들의 소박한 가게들이겠지 싶었던 것이다. 오전 11시쯤, 문을 열기 시작한 가게 주인들과 눈길이 마주쳤다. ‘들어오세요’하는 시선이었다. 이 길을 걷는 당신이 반드시 들어와 봐야 할 곳이라는 듯이.
외지에서 종달리를 찾아 이주한 이들이 궁금했고, 조금 부러웠고, 살짝 존경스러웠다. 어디든 삶의 피로는 있겠으나, 나를 몰아세우지 않는 어떤 대안적 삶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제주살이를 밀어붙여 결국 정착하게 한 것은 어떤 힘이었을까. 어떤 절박함이었을까. 나와 내 주변에 많은 이들이 입버릇처럼 “제주”를 부르짖지만, 떠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릴 붙들고 있는 자리를 견디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꿈 이상의 전진을 잘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꿈을 꾼다’는 말은 ‘꿈은 꿈일 뿐이지’ ‘나는 할 수 없다는 걸 알아’라는 말과 같지 않을까. “제주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할 때마다, 제주는 점점 더 꿈으로 굳어지고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골목에 사진 스튜디오 하나가 보였다. 문을 열지 않았다. 손차양을 하고 창문 안을 들여다보는데, 집주인 할머니가 때마침 나왔다. “뭘 들여다봐요?” “안녕하세요. 제가 사진 찍는 사람이라 사진관에 관심이 많습니다.” 젊은 사람이 세 들어서 하는 거라고, 마당 지나 안쪽에 안채가 있다는 둥 할머니의 집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등 뒤로 깊은 마당이 보였다. 사진관 자리는 별채였을까, 창고였을까, 아니면 우사였을까를 가늠해보다가, 역시 이 스튜디오를 낸 ‘젊은 사람’은 또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을까, 궁금해지고 말았다. 골목을 걸어 나오다 공터에 차를 대고 사진관 쪽으로 걸어가는 한 청년을 보았다. 옆구리에는 큼지막한 카메라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의 뒷모습에 대고 속으로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제주에서 살게 된다면 난 뭘 할 수 있을까. 이건 질문의 진전이다.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섬으로의 이주에 중요한 전제가 되지 않을까. 살다 보면 뭘 할 건지 찾아지겠지 하는 ‘무대뽀이즘’은 내 소심한 간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작은 삶을 영위할 정도의 돈은 벌릴까. 뭐 이런 상념들이 밥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말풍선처럼 따라붙었다.
분홍색 지붕을 이고 있는 건물이 멀리서 눈에 띄었다. 식당 ‘종달미소’가 저기구나. 근거도 정보도 없었지만 가볍게 들뜬 색과 상호를 연관 지었다. 정답이었다. 흰색 외벽에 분홍 지붕을 올린 종달미소는 “맛있게 먹고 웃으며 나서길" 바라는 주인장의 마음이 담긴 가게였다.
한 달 살기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무계획’이요, 또 다른 하나는 ‘소식(小食)’이었다. 간단하게 사니, 식탐도 줄어든 것 같다고 느낄 즈음, 친구들이 놀러 와서 1일 5식을 먹여주고 떠났다. 다시 위가 늘어난 모양이었다. 8000원짜리 한식뷔페의 화려한 식단 앞에서 식탐이 솟구쳤다. 어느 배고픈 날에 분명히 이 집이 떠오를 것이라는 최면이 걸리는 것 같았다. 큰 배낭을 멘 이가 찌든 피로감과 시큼한 땀내를 풍기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무슨 대회에 출전이라도 한 듯이 접시 위에 음식으로 위태롭게 탑을 쌓았다. 그래 든든하게 먹어야 걷지. 걷다 보면 금방 또 꺼질 거야. 민망해진 나의 식탐에 즉시 면죄부가 주어졌다.
식후 일출봉까지 걸었고, 이어 광치기 해변으로 향했다. 해변 입구 ‘터진목’이라 불리는 곳에 제주 4·3 사건의 추모비가 서 있었고, 일출봉이 빤히 바라보이는 물가 대리석에 작가 르 클레지오가 <GEO> 잡지 2009년 3월호에 실었다는 제주기행문 중 일부가 새겨져 있었다.
“섬에는 우수가 있다. 이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마음 갑갑하게 만드는 이유다. 오늘날 제주에는 달콤함과 떫음,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있다. 초록과 검정, 섬의 우수, 우리는 동쪽 끝 성산 일출봉 즉 ‘새벽바위’라 불리는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 바위는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한 검은 절벽이다. 한국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첫 해돋이의 마술적인 광경의 축제에 참석하러 오는 곳이 바로 여기다.
1948년 9월 25일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하야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그들의 눈앞에 보였던 게 이 바위다. 나는 그들이 이 순간에 느꼈을, 새벽의 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비추는 동안에 해안선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친숙한 모습으로 향한 그들의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냉전의 가장 삭막한 한 대목이 펼쳐진 곳이 여기 일출봉 앞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1948년 4월 3일에 제주에서 군대와 경찰이 양민학살(인구의 10분의 1)을 자행한 진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르 클레지오의 기행문 중에서)
1948년 죽음을 앞두고 버스에서 내려지던 성산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던 일출봉과 아침 바다를 그려봤다. 일출봉이 지켜봤고, 또 기억할 사람들의 눈빛과 울음을 상상했다. “마술 같은” 비경을 가진 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은 양민학살을 떼어내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처에 스민 상처와 우수가 제주라 생각하니, 더위에도 불구하고 바다와 일출봉을 둘러싼 스산하고 처연한 풍경이 설명이 되는 것 같고, 왜 이곳이 제주올레의 첫 코스가 됐을까 하는 궁금증도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4·3 사건에 대한 수많은 증언과 글이 있을 텐데 굳이 프랑스 소설가의 글을 올레길에 새겨놓았을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권위에 이 아픈 역사가 기대고 있다고 생각하니, 좀 서글퍼졌다.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