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평대생활>14일째
파도가 밤새 다져놓은 모래 위에 첫 발자국을 내는 일이 괜히 좋다. 아침 산책길에서 흐린 하늘을 바라보다 돌아서는데 두꺼운 구름 사이로 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면 위로 거대한 비늘처럼 번져가는 빛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차분해 가만가만 쿨렁이는 파도소리와 그 위에 서너 종은 될 것 같은 작은 새들의 노래가 포개졌다. 인위가 없는 자연의 일 앞에 겸허해지고 또 평안해졌다. 아침바다를 자꾸 찾게 되는 이유일 것 같다.
제주에 한 달을 살겠다고 했을 때 “놀러 한 번 갈게”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말이 ‘지금 당장 밥 먹기는 싫다’는 말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지나가듯 던지는 “한 번 갈게”라는 말을 크게 담아둘 이유는 없었다. 2주 동안 어떤 이도 찾아오지 않았다. 연락조차 없는 것도 일종의 배려일 것이다. 제주행이 말처럼 쉽지도 않았을 테고.
2주일 만에 민박집에 사람을 들이게 됐다. S와 H는 새벽같이 일어나 첫 비행기를 탄 것 같았다. 하루를 온전하게 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식전에 벌써 도착해 렌트하러 간다며 “아침 같이 먹자”고 전화를 해왔다. 제주 오기 전 이 친구들은 지나가는 말처럼 “한 번 갈게”라고 했고, 난 ‘설마’했다. 솔직히 ‘안 왔으면...’했다. 하지만 기어이 오고 말았다.
열흘 전쯤 둘은 자기들의 제주행 왕복 탑승권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이미 끊어버렸다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탑승권 사진은 말하고 있었다. 주말도 아닌 월, 화, 수 사흘 일정이었다. 본 적 없는 추진력이었다. 온다는데 말릴 수 없었다. 입장을 바꿔놓아도 가겠다는 나를 반겨줄 친구들이었다. 막상 2주를 혼자 지내다 보니 은근히 설레기도 했던 모양이다. ‘아는’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렌트 차량으로 일찌감치 집에 도착한 친구들은 들떠있었다. 친구 셋만의 휴가는 내 평생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집을 둘러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눈에 뭐가 들어오던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곧 배고프다고, 아침 먹자며 서둘렀다. 집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유령처럼 배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를 가엽게(?) 여긴 친구들은 나름의 굵직한 일정을 짜서 온 듯 움직였다. 궁하게 먹고 있을 걸 예상했다는 듯 “1일 5식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세화 바닷가에 해녀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전복죽과 소라회 등으로 아침을 먹었다. 오가며 보던 식당인데 들어가서 먹을 생각은 전혀 없던 곳이었다. ‘맛집’이었다. 누가 추천하지도 소개하지 않는 맛집. 식생활 루틴에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그렇게 벗들과의 사흘 일정이 시작됐다. 제주살이의 일탈이 시작된 것이다.
오후에 서귀포항에서 배낚시가 예약돼 있다고 했다. 식사 후 시간이 어중간하게 떴다. 우린 아부오름에 오르기로 했다. 허투루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리와 이동시간을 고려했다. 게다 높지도 않고 절경이란다. H는 나보다 두 달쯤 앞서 한 달 제주살이를 했었다. “자전거 타고 섬을 돌면서 오름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며 덩치와 평소 행실(?)에 어울리지 않는 낭만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H는 뭘 또 찍어보겠다고 드론을 띄우기도 했다. 또 이걸 바라보고 있는 S와 나. 중년 남자 셋이 오름에 올라있는 그림은 의미를 부여하고 꾸며도 이쁜 그림으로 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주에 와서 가장 멀리 갔다. 서귀포항에서 예약한 배에 올랐다. 평소 낚시를 좋아하는 S는 고등어 미끼를 추가로 구입했다. 낚싯배 난간에 한 움큼씩 올라가 있는 잔 새우로는 작은 것밖에 못 잡는단다. 항구를 떠난 배는 앞바다로 나갔고 우린 낚싯대를 드리웠다. 릴이 있는 낚시는 ‘처음’이었다. 이 묵직한 나이에 처음 해보는 것이 참 많다. 앞으로 처음인 것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도대체 못해본 것들은, 또 영영 못할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진득하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걸 잘 못하는 성격이라 낚시 얘기에는 늘 시큰둥했다. 하지만 친구들과 나란히 낚싯대를 붙들고 있는 자체는 내게 특별한 이벤트였다. 뭔가 툭 건드리는 손의 감각으로 낚싯대를 쭉 뽑아 올려 릴을 감았다. 아래로 당기는 작은 존재의 무게감이 좋았다. 난 이 모든 게 서툴렀고 S가 옆에서 도와줬다. 가시가 선 쏨뱅이라는 손바닥만 한 물고기가 올라왔다. “이야, 소질 있네~”라며 주먹 하이파이브를 걸어오는 친구. 별로 한 것 없이 칭찬을 들었다. 희한하게 초짜들의 미끼를 잘 무는 이유는 뭘까, 내내 궁금했다.
낚싯대 끝을 바라보고 있는 두 친구를 바라봤다. 물결에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같은 해에 사진기자가 되어 현장에서 만나 동기이자 친구가 된 녀석들이다. 새삼 든든했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소중한 존재들로 부터의 위로도 있고 또 그만큼의 짠함도 있다. 내가 한달살이라는 조금 유별난 휴식이 필요했던 것만큼 친구들도 이런 시간들에 목말랐을 것이다. 가족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제주로 날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부분이다.
두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손맛’의 맛을 봤다. 낚시에 빠지는 이유를 조금 짐작하게 된 것도 같다. 두 친구가 아니었다면 맛보지 못했을 재미고, 녀석들이 없었다면 그만한 재미까지는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가까운 식당에서 쏨뱅이 회를 떴고, 매운탕을 끓였다. 낚시가 처음이었으므로 이런 회와 매운탕도 역시 처음이었다.
H와 S는 간단한 캠핑 장비를 챙겨서 왔다.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장을 봤다. 해 질 녘 바닷가로 향했다. 간소한 캠핑 장비를 펼치고 불을 피웠다. 혼자 보던 바다와 하늘을 같은 자리에서 친구들과 함께 바라봤다. 어둠이 내렸고, 우린 흑돼지를 구웠다. H가 준비한 위스키와 소주와 맥주를 이리저리 섞어서 마셨다.
“친구야~ 참 좋다~”(이 감탄은 문자로 표현되지 않는 우리만의 아주 특별한 톤이 있다)를 추임새처럼 썼다. 안주도 술도 달았다. 모래나 해초를 씹어도 달았을 것이다. 우리를 위한 위안의 시공간이 펼쳐졌다. 주저하거나 검열하지 않고 뱉는 가벼운 말들(정말 가벼운 말들이다)과 나오는 대로 웃는 웃음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취기가 오르고, 이야기가 이어지다 끊어지고, 그 사이 우리의 시선은 먼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저마다의 그리움과 외로움 같은 감상에 솔직하게 빠져드는 순간일 거라 생각했다.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