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평대생활> 13일째
아침바다에는 나같이 이들이 더러 있다. 바닷가 산책이 주요 일과인 사람들이다. 카메라를 든 이도, 캠핑의자를 펼쳐놓고 글을 끼적이는 이도, 해안도로변을 걷는 이도, 반려견과 백사장을 거니는 이도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지만, 한편 각자의 아주 개별적이고도 고유한 바다이기도 할 것이다. 저마다의 바다! 저마다의 바람! 저마다의 제주!
그럼에도 한날한시에 평대의 바다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일면식 없는 이들과 금방이라도 어깨동무를 할 것 같은 연대감을 느낀다. 문득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오늘은 올레 21코스를 제대로 걷고 싶었다. 해안과 마을길을 따라 일부 걸어보긴 했지만, 온전한 21코스를 왕복할 작정이었다. 민박집이 올레 20코스 마지막 구간쯤에 있어 조금만 걸으면 21길의 시작이기도 했다.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작은 언덕과 밭담 사이로 난 좁은 흙길을 한참 걸었다. 누군가 맨 먼저 걸어가고, 그 위에 또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며 파이고 다져진 길을 오늘 내가 따라 걸어간다고 생각하니, 잔잔한 감동이 솟았다. 가슴 한쪽이 뻐근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이어져서 지워지지 않는 이 길로 다시 또 수많은 이들이 걸어오겠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걸을까, 왜 걸으려 했을까. 물을 수 없고, 물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질문, 다소 무례하기까지 한 이 질문을 내가 받는 다면? 글쎄, 나는 구구절절 답하는 대신 ‘씨~익’하고 한 번 웃고 마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멋진 답이겠지, 하고 혼자 생각했다.
길에서 만나는 어떤 느낌이나 장면 앞에서는 멈춰 섰다. 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 대상에는 카메라를 들었다. 이 사진은 걷는 동안의 나를 설명하고, 내가 드러나는 일이기도 했다. 글이나 말 대신 사진 이미지로 표현하고 기록해보는 것이다. 그 안에는 지금 뜨겁게 느끼되 당장 문장으로 지어지지 않는 것들, 그런 마음들이 담기기도 했다.
사실, 이 글처럼 그 순간이 다 지나간 뒤, 밤이 돼서야 뒤늦게 그때 마음을 복기해 문장으로 표현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가장 뜨겁던 그때의 심상과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날것의 거칠고 솔직함보다 벌어진 시공간만큼의 상상과 가공이 보태지기 마련인 것 같다. 그나마 사진이 ‘바로 그때’의 마음과 감각을 복기하기에 가장 적절하고 충실한 매체라고 여겼던 것이다.
두서없는 상념들이 떠올랐다. 이를 붙들고 사유라는 것을 시도하지만 이내 다른 게 파고들면서 애초의 것을 밀어내곤 했다. 오래 머물지 않고 제대로 잡히지도 않는 이런 상념들의 출현이 그런대로 반가웠다. 나의 무의식일 수도 있고, 눌러놓은 ‘찐생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뭐든 소중해졌다.
홀로 걷는 길에서 조금 심심하지만, 대신 많이 평화롭다고 느꼈다. 평화로운 중에 찾아드는 생각이 마냥 평화로운 종류의 것은 또 아니었다. ‘그동안 그 정도면 잘해왔다’며 나를 토닥이다가도, 어느 구간, 어느 순간의 일과 관계에서 느꼈던 절망과 분노와 미움이 느닷없이 불쑥 올라왔다. 몸 안에 변화가 피를 뛰게 만든 것인지 관자놀이 부위가 뜨끈해지기도 했다. 평화로운 길에서 당황하고 민망해지는 일이 빈번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내려놓으라는 이 섬의, 이 길의 명령인가. 화가 덜어내어 지는 과정일까. 털어낸다, 내려놓는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좋은 길 위에서도 그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들로만 채워지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생의 불안이 한 번씩 스쳐 지나갔다. 심지어 은퇴 후 막연한 삶에 대한 고민까지 샅샅이 긁어 와서 지금 여기 이 좋은 곳에서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래야 달라질 것도 없는데 말이다. 여하튼, 이런 것들이 길 위의 평화 중에 다리의 힘을 풀어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웃픈’ 것은 제주에 온 뒤 신문 한 줄 읽지 않았고, 뉴스도 거의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뉴스에 파묻히는 직업이니, 쉬려면 뉴스를 되도록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다. 어쨌든 뉴스가 없으니 골치 아프고 화나는 일도 줄고, 가볍고 맑아진 일상을 누리는 것 같았다. 이 지경에 신문사 사진기자의 일은 도대체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또 뭘 할 수 있을까. 걸을 땐 이런 무기력도 아주 간단히 엄습했다. 뭐, 곧 다른 생각들이 밀어내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올레 코스는 마을길을 관통하고 해안을 걷다가 다시 마을길로, 다시 바다로 연결돼 길에서 제주를 골고루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중간중간에 오름도 코스에 편입이 됐다. 종달리 구간에는 지미봉 정상(163m)을 지나야 했다. 평대에서 성산 방향을 보면 늘 보이던 친숙한 봉우리다. 반가움은 잠시 “하악~하악~”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올랐다. 더위에 10여 km를 걸어 몸이 묵직한 데다가 등산로가 가팔랐다. ‘아~ 힘들다’ ‘정상은 멀었나’ 딱 두 문장만 머릿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했다.
긴 코스를 걷는 중에 굳이 산을 오르게 하는 올레 설계자의 의도를 짐작했다. 버거워도 올라야 하는 산이 있다. 평지만 걸을 수 있는 인생은 없다. 길 위의 인생은, 인생이라는 길은 이런 것이 아니겠나. 꼭 인생의 은유처럼 배치된 길이라고, 다리가 후들후들 거리는 중에 되뇌고 있었다.
21코스의 끝 종달항까지 걷고 되돌아오는 길. 내 안에서는 어떤 질문도 곱씹을 거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덥고 지치고 배고팠다. 빨리 집에 가서 씻고 맥주 한 잔 마셔야지, 생각하는 순간 흐뭇해졌다. 다리에 다시 힘이 붙는 것 같았다. 걸음에 속도가 붙었고 곧 행복해졌다.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