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평대생활> 12일째
평대 마을투어에 참가하기로 했다. 이곳 토박이자, 농부인 ‘평대리 홍반장’ 석희삼춘이 마을여행의 안내자였다. 출발장소는 ‘당근과 깻잎’ 카페였다. 카페 벽에는 ‘농부 부석희삼춘과 떠나는 찐제주여행’이라는 문구와 새까만 석희삼춘의 치명적인 웃음 사진이 들어간 '제주착한여행'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투어 참가자는 같은 민박집 바깥채를 쓰는 캘리그라피 작가와 나, 가족 네 명, 이렇게 총 여섯 명이었다. 당근주스를 한 잔씩 마시며 서로 인사를 나눴다. 석희삼춘은 일행 중 두 아이에게 테이블에 꽂혀있는 꽃의 이름을 맞춰보라며 즉흥 퀴즈를 냈다. 부모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이가 “당근꽃?”하고 자신 없게 대답했다. “정답!” 꽃이 피기 전에 뿌리인 당근을 캐서 먹으니 좀처럼 보기 힘든 꽃이다. 퀴즈는 이어졌다. “꽃말은?” 석희삼춘이 물었다. 난생 처음 본 꽃의 꽃말을 맞힐 사람은 없다. 결국 본인이 답했다. “죽음도 두렵지 않으리.” 피기 전에 꺾이는 운명이라 더 비장하게 들리는 꽃말이다.
카페 앞에 준비된 여행‘트럭’에 올랐다. 평대에 도착한 날 얻어 탔던 석희삼춘의 낡은 트럭이었다. 짐칸에 작은 벤치의자 두 개가 ‘ㄱ’자로 놓였다. 트럭에 서로 끌어주며 오르는 여행자들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이미 특별해진 여행이었다.
트럭은 평대초등학교 앞에 섰다. 그는 도로 건너 낮은 동산에 숨은 듯 서 있는 비석으로 시선을 유도했다. 비석은 동창들이 회갑을 기념해 세운 것이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념비였다. “스물여덟 명의 동창 중에 열두 명이 살아서 회갑을 맞았어요.” 제주의 깊은 상처이자 그늘인 4.3 사건이 비석의 사연에 서려 있었다. 이 비극적 사건이 제주를 덮쳤을 당시 청년시절을 보냈던 이들 중에 회갑 때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이 비석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는 살아남은 자의 비석이면서 동시에 살아남지 못한 자의 묘비였다.
현대사에서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사건인지라, 살아남지 못한 동창들의 이름을 차마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했다. 마을 몇 곳에 이런 비석들이 있었다. 늘 다니던 길가에도 있었으나, 사연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저 지나쳤던 것이다. 석희삼춘의 설명에 평대를 이루고 있는 이야기의 중요한 퍼즐 하나를 맞춘 것 같았다. 여행자인 나는 겨우 개의 퍼즐 조각으로 평대를 이해하고 또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제주에 드리웠던 현대사의 상처 앞에 성인 참석자들은 엄숙해졌다.
다음은 평대항 빨간 등대였다. 내겐 이미 친숙해진 아침산책 코스다. 이곳엔 어떤 얘기가 있을까. 석희삼춘은 등대를 중심으로 왼쪽 멀리 보이는 어등포에서 오른쪽 멀리의 우도에 이르기까지 큰 반원을 그리며 움푹 들어간 평대마을의 매력을 설파했다. 밤이면 이 반원이 그린 불빛에 한치잡이 배들이 앞바다에서 밝힌 집어등 불빛이 연결돼 거대한 빛의 원이 그려지는 것이다.
이어 막연하게 꿈이라 생각하며 살았다는 어느 날들에 대한 기억을 얘기했다. 여섯 살 때 바닷가 자신의 집에서 20여 일 잔치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꼬마 석희는 와인(으로 기억했지만 꼬냑이나 위스키였을 지도 모른다)을 마시고 내내 취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불과 수년 전까지 꿈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일을 꽤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어르신들의 육성들을 모아 하나의 사건으로 구성해냈다. 그의 손끝은 바다에 점처럼 보이는 하얀 부표를 가리켰다.
“저기가 암초가 있어요. ‘배 가라앉은 여’라고 부르지요. 보물선이 가라앉은 곳이죠.”
어르신들이 전한 얘기는 이렇다. 스페인 선박이 ‘도체(깨)비불’을 잘못 보고 오다가 물속 바위에 부딪쳐 가라앉았다. 마을 사람들이 선원들을 다 구해냈다. 해안에는 선박에 실려 있던 술병이 날마다 떠내려 왔단다. 마을 청년들이 뗏목을 만들어 나가서 선박에 난 구멍으로 들어가 와인을 꺼내오기도 했다. 연일 마을잔치를 벌어졌던 것이다. 유명 호텔에서 이 술을 사가기도 했다. 누군가는 밤에 몰래 헤엄쳐 배에서 양껏 술을 가져 나오다 죽음에 이르기도 했단다. 바다가 탐욕에 벌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었다. 꿈이었던가, 싶었던 석희삼춘의 기억이 나이 아흔이 넘은 어르신들의 인터뷰를 통해 근사한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더 늦었으면 기록되기 어려웠을 마을 이야기다.
트럭에서 내린 참가자들이 골목을 걸었다. 평대리는 차가 다니기에 넉넉할 정도로 골목이 넓은 편이다.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자신의 땅을 내놓아 가능했다고 한다. 석희삼춘은 동네 가운데를 관통하는 좁은 흙길에서 설명을 이어갔다. 진입로에 사는 어르신이 수십 년 동안 땅을 내놓지 않아서 다른 골목과 달리 비포장 옛길이 그대로라고 했다. 어르신의 욕심과 고집이 결국에는 매력적인 옛길을 지키는데 공헌을 한 셈이었다. 올레 20코스가 지나가는 길이었다.
이날 투어의 마지막 장소는 반쯤 주저앉은 초가집이었다. 역시 석희삼촌의 어릴 적 기억으로 얘기는 시작됐다. 마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던 삼거리 가게 앞에서는 술 마신 어른들이 그렇게 싸움을 했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그가 학교 가며 지나던 이곳에 ‘혹 하르방’과 ‘좀좀하르방’이 나타났다고 했다.
아이들은 말을 할 때마다 “혹, 혹, 혹” 쇳소리 같은 괴성을 내는 혹하르방을 무서워했다. 지나는 이들, 싸우는 이들을 향해 언제나 “혹, 혹”하는 할아버지 옆엔 ‘좀 조용히 하라’는 제주말 “좀좀”이라고 하는 좀좀하르방이 있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눈깔사탕 사 먹을 용돈을 쥐여 주곤 했다. 자식이 없었던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참 이뻐했다. 할아버지들의 등장으로 술 마신 어른들의 다툼이 종적을 감췄다고 석희삼춘은 회상했다.
석희삼춘은 혹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아버지의 친척들을 수소문해 들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외아들은 뭍에서 대학을 다녔다. 한국전쟁 때 징집됐고, 훈련 중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소식을 접한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갔고 말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폐가가 된 초가집은 혹할아버지가 살던 집이다. 어릴 때 어른들은 아이가 말을 안 들으면 “혹하르방한테 데려간다”고 했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는 무서운 존재였다.
석희삼춘은 추억 속 이야기는 세월호 이야기로 이어졌다. 제주에서 진행됐던 탄핵 촛불집회에 다녀오다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밤에 이런저런 상념 속에서 혹할아버지를 떠올렸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혹~”했던 야단이 동네 풍경을 바꾸었다고 그는 믿었다. “대통령 곁에, 선장의 곁에 혹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마을투어의 맺음말이었다.
초가집 마당에 앉아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울림이 생겨났다.
세월호가 향했던 제주가 아닌가.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