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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Aug 26. 2021

제주에서 잘 지낸다는 말에는

<슬기로운평대생활>11일째

걸었던 거리와 시간이 쌓여 발가락에 두 개의 물집으로 남았다. 핑계 삼아 동네에서 빈둥대기로 했다. 간밤에 잠을 설쳤다는 건 추가된 핑계다. 다 비바람 때문이었다. 양철지붕과 창, 돌담과 마당을 두들기는 소리가 컸다. 소리를 지닌 것들이 비바람에 모조리 저마다의 아우성을 지르며 경연을 펼쳤던 것이다.     

잠을 설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요란한 날씨 탓에 방으로 기어든 벌레 때문이었다. 잔다고 침대에 누워 우연히 시선을 던진 벽면에 거뭇한 것이 처음엔 무슨 얼룩인가 했다. 그런가 보다 했으면 됐을 텐데 그 틈에 이게 꿈틀거렸다. 기겁을 했다. 무시하려 해도 잠든 동안 스멀스멀 몸 주위를 기어 다니는 상상을 하니, 몸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불을 켜고 눈알을 병적으로 굴리며 벽을, 바닥을 훑었다. 이건 뭐 벌레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다리가 아주 긴 거미와 다리가 아주 많은 벌레가 침대 밑으로, 문틈 사이로 서둘러 숨어들었다. 그 와중에 지네 한 마리가 유유히 기었다.   


이 집안의 어딘가에 거처를 두고 살고 있었을 벌레 들일 터다. 비바람이 흔들어대니 놀라서 피하듯 방과 거실로 튀어나온 것이리라. 이 다리 많은 생명들의 존재를 모르고 지냈던 날들이었다. 마치 원효대사가 어둠 속에서 달게 마신 바가지의 물이 다음날 아침에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더라, 는 비유를 떠올린다. 원효는 득도를 하였다지만, 난 그저 짜증지수가 올라갔을 뿐이다. 눈 감아도, 수면 유도용 음악을 들어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벌레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고 생각하니,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싶어 한심해지는 것이다. 

한적한 시골에서 텃밭 가꾸며 친환경적 삶을 살고 싶다는 막연한 말을 유행어처럼 하고 살았다. 소박하게 살겠다는, 그리 살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발언이기도 했다. 친환경적으로 살아가겠다는 말이다. 친환경적 삶을 소망한다면 이 낯선 벌레들과의 공존까지 고려된 것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조건이 생겼다. 벌레들이 친환경의 지표가 되기도 하니까.  


황현산 선생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친환경 미술 활동가를 도와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수세식 화장실 아닌 친환경 화장실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대학생들은 500m 떨어진 초등학교 화장실까지 일 보러 갔다는 것이다. 선생은 “안타깝지만 나도 그럴 것 같다”라고 썼다. 환경에서 멀어져 버린 도시의 삶이 다시 환경에 가까워지기까지 생각지 못한 난관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제주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벌레에 좀 익숙해져 보자고 마음을 다진다. “제주에서 잘 지낸다”는 말에는 이 다리 많은 생명과의 친밀한 관계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일 오던 비는 해 질 녘에야 개었다. 비바람 탓인 걸 확인해주듯 벌레들도 종적을 감췄다. 바닷가로 향하다 카페로 불쑥 들어갔다. 집에서 바다로 이어진 골목길 끝이어서 하루 서너 차례는 지나게 되는 전망 좋은 카페다. 마을 사람이 마을 명소 안 가듯, 가까워서 오히려 안 가게 되는 곳이었다. 열하루 만에 들어섰다. 유명하다는 당근케이크와 커피를 주문했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오가는 이들과 그 너머의 바다가 창의 사각 앵글 속으로 들어왔다. 카페에 흐르는 음악 때문이었을까. 낮에 멜론에서 찾아들었던 아이유의 노래에 묘한 위로가 있었다는 생각을 했고, 아이유를 검색해 유튜브에 뜬 방송영상 하나를 우연히 보게 됐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열심히 한 건 일밖에 없구나. 이게 열심히 살았다고 할 수 있나. 일이 삶의 전부는 아닌데... 일만 하느라고 다른 거는 남들보다 열심히 하지 못했구나. 주변을 잘 돌봤나. 나 스스로는 잘 돌봤나. 내 집이 잘 정돈이 돼 있나. 우리 집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나. 너무 서툴더라고요. 내가 중독이 돼 있었던 건 성취, 보람 같은 좋은 의미들 보다는 일이 주는 자극적임에 중독돼 있던 것 같아서 이게 과연 건강한 열심이었나. 앞으로는 달라져야겠다. 내가 조금 경계를 하면서 건강하게 일을 해야겠다.”


어쩜 이런 생각을 할까. 이 친구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일찍 철들어버린 20대 후반의 가수는 자신의 인터뷰에 벌레에 쉽게 겁을 먹는 40대 후반의 아저씨가 제주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위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y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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