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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Aug 24. 2021

별일 없는 게 아닌 날들

<슬기로운평대생활>10일째

바람 없는 날은 없었다. 바람의 존재감이 가장 크게 드러난 날이었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만든 갖가지 소리들이 들려왔다. “끼익 끼익” 문짝이 밀렸고, “싸아~~”하며 나뭇잎사귀들이 부딪쳤고, “위잉~ 위잉~” 바람이 돌담과 골목을 휘저었다. 창틈을 밀고 든 바람은 커튼을 사정없이 뒤집어놓았다. 바람은 소리로 선명한 존재를 한참 동안 증명했다. 귀에 모든 감각이 쏠렸다. 눈을 감게 만든다. 훗날 평대의 질감을 떠올릴 때 지금 이 바람을 맨 앞자리를 차지할 것 같다.   

바람 속에 산책을 감행했다. 아침산책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귀한 ‘루틴’이다. 바람에 떠밀리며 걸었다. 방파제 위 등대 앞에서 수평선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바다와 하늘 사이에 바람을 바라보겠다며 섰다. 시야에는 인공의 것은 없었다. 오직 자연만이 채워져 있었다.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고, 듣고 있어도 들리지 않고, 내 안의 언어도, 언어로 조직되는 생각도 사라졌다. 불과 몇 초였을까. 하얘졌다. 내가 향하고 있던 자연 속에 잠시 빨려 들어갔었던 것이라 생각했다. 멍을 때린다는 것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글쎄 이걸 ‘자연과의 교감’이라 표현해도 될라나. 

바다에서 시선을 걷어 마을을 바라봤다. 어제 올랐던 다랑쉬오름은 다시 몸을 숨겼다. 서 있는 동안 바람은 쉬지 않고 몸을 이리 밀고 저리 당겼다. 체감하는 바람에 비해 파도는 거칠지 않았다. 어제까지의 제주 바람과 달리 오늘의 바람은 외지인에게 살짝 두려움을 안겼다. 이게 제주의 진짜 바람이구나.   

발가락에 물집이 잡혀 걷는데 신경이 쓰였다. 참 오랜만의 경험이다. 언제 발에 물집이 잡혔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마도 논산훈련소에서 행군할 때 정도 아니었을까. 날이 궂었다. 집에서 보내자 싶어 늦은 아침을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음악도 틀어보고, 책도 펼쳤다. 잠은 오는데 잠들지 못했다. 바람 때문이었다. ‘좀 나가보는 거 어때?’ 바람이 떠미는 듯했다.   

장날이었다. 세화 5일장으로 걸었다. 두 번째 가는 5일장이었다. 한 번의 경험이 크긴 했다. 에코백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익숙한 걸음으로 장터로 향하는 내가 잠깐 낯설었다. 하릴없이 장터를 두어 바퀴 돌았다. “낙지젓하고 창난젓 5000원어치씩 주세요.” 주뼛대지 않고 꼭 여기 주민인 양 제법 자연스럽게 말한 것 같아 혼자 으쓱해졌다. 지난 장날에도 젓갈을 샀었다. 누룽지를 끓여서 얹어 먹다 보니 젓갈이 헤펐다. ‘젓갈이 헤펐다’라고 쓰면서 새로운 경험이 살면서 쓴 적 없는 문장으로 써진다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세화 5일장 두 번, 그러니까 제주에서 열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의 3분의 1이었다. 물컵의 비유가 떠올랐다. 물이 절반이 비었다와 절반이 남았다. 휴가가 지나가는 속도를 생각하니, 마냥 남은 날들을 긍정할 수가 없었다. 휴가가 3분의 1이나 지나갔고, 이제 겨우 3분의 2밖에 남지 않았다.   


민박집주인께서 문자를 보내왔다. “지내는데 불편한 게 없는지”를 물은 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각인, 확인 사살, 쐐기를 박듯 “어느새 6월도 열흘이 후~욱 가버렸네요”라고 덧붙였다. 주인의 다정한 마음을 알기에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에 “^^”까지 붙여 답하고 말았다.  


지난 열흘을 복기해보니, 심심하지도 지루하지도 그렇다고 외롭지도 않았다. 평대에 도착하던 날, 민박집 지붕 뒤로 펼쳐진 석양을 보며 “참 잘 왔다”고 했었다. 그 생각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곳의 시간과 소소한 경험이 쌓이면서 잘 왔다는 안도의 마음은 더 짙어지는 것 같다. 

오늘도 별일 없었던 하루였다, 고 쓰다가 도대체 ‘별일’이란 무엇일까 싶었다. 생각의 각도를 틀면 지금 이 하루하루가 너무 특별한 날 아닌가. ‘역시 별일이던 하루’라고 써야 하는 건가. 지금 밖에서는 비바람이 맹렬하다. 노골적인 자연현상은 ‘내가 뭐 잘못한 건 없나’ 괜히 돌아보게 한다. 혼자서 겸허해지고 약간 착해지는 기분이다. 별일인 것이다. /yaja

'당근과 깻잎'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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