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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Aug 18. 2021

속도는 생각의 크기와 반비례한다

<슬기로운평대생활>8일째


‘너무 빨리 걷는구나.’ 문득 든 생각이었다. 


급한 일이 없어도 너무 없는 곳에서, 누가 쫓아올 일도 없는 휴가지에서 꼭 경쟁하듯 걷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느슨하게 잘 보내고 있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몸의 관성은 여전히 속도에 젖어 있다. 평소 여럿이 걸어갈 때도 혼자 저만치 앞서 걸어, 같이 걷는 이들의 핀잔을 듣곤 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일단 서두르고 보는 게 오랫동안 밴 습관이다. 걸음뿐 아니라 먹는 것도 급하다. 이는 제대로 있으나 잘 씹지 않는다. 먹는 동안에 딴생각에 빠져버리면 앞에 누가 있든 없든 속도가 붙는다. 보통 동석자가 절반쯤 먹으니 혼자 2배속으로 들이켜는 것이다. 일을 앞두고도 급하다.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마음이 저만큼 달려 나간다. 몸이 뜰썩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해진다. 이런 것들이 내 생활의 익숙한 일부가 되었고, 그것이 나의 성격이 되었다. 내게도,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놈의 ‘빨리빨리’가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에 연민의 감정이 돋는다.      


‘느리게 가도 되잖아. 급히 걸을 이유가 전혀 없잖아.’ 의식해서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다. 다시 슬며시 빨라지려는 걸음에 주기적으로 경고를 줘야 했다. ‘제발 좀 천천히’    


평대 주변은 올레 20코스와 21코스가 지난다. 코스를 따라 정직하게 걷진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지만, 대체로 바다를 곁에 두었다.   


‘오늘은 어디로 걸어볼까’ 


바다를 등지고 가보기로 했다. 고민 없이 ‘비자림’으로 결정했다. 민박집 앞 일주동로에 걸려 있는 큼지막한 비자림 이정표는 오가며 봐왔다. 숲으로 향하는 1112번 도로는 좌우로 밭이 보이는 2차선 도로였다. 갓길을 따라 걸었다. 인도나 자전거도로는 따로 없었다. 바다를 보며 걷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다. 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우거진 숲이 비경이었다.  

편도로 6km쯤 되는 길을 걷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걷기엔 좀 위험해 보였다. 지나는 차량이 일으키는 바람과 진동이 몸을 살짝 밀어내는 것 같았다. 빈 택시 한 대가 속도를 늦추고 나를 졸졸 따라왔다. 기사님이 고개를 빼고 나를 바라봤다. ‘여기는 걷기엔 위험한 길이야. 웬만하면 타고 가지’라고 하는 눈빛과 잠시 마주쳤다. 조금 흔들렸으나, 곧 외면했다. 가망 없는 손님을 속히 포기한 택시는 다시 속도를 냈다.  


비자림은 비자나무를 비롯해 수많은 나무들이 자연의 매력을 지닌 곳이다.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 휴가로 와서 한번 둘러본 적이 있었다. 입구부터 눈에 익었다. 관광이 아니라 하루 걸을 거리의 반환점으로 정한 터라, 그냥 돌아갈까 했다. 숲 입구에는 관광객들이 꽤 있었다. 하나같이 마스크를 썼지만 드러낸 눈과 미간은 즐거운 표정이 묻어났다. 표정들이 만든 공기가 좋아서 덩달아 숲길로 걸어 들어섰다.   


‘천천히 걸으리라. 피톤치드를 두 배는 마시고 갈 수 있도록.’ 

걸음의 속도를 의식하다가 궁금증이 생겼다. 필요 이상으로 빨리 걷는 사람, 만사가 ‘빨리빨리’인 사람에게 시간이란 어떤 것일까. 시간을 누리기는커녕 늘 쫓아가고 또 쫓기는 이들은 시간을 다르게 감각하지 않을까. 물론 본인은 모르겠지만. 상대적 시간은 초과하는 속도만큼 빠르게 흐를까, 아니면 반대로 그만큼의 여유가 남을 것인가. 조급한 마음으로 살면 인생은 상대적으로 더 짧아지는가, 길어지는 걸까. 헷갈리는 와중에 확실하다 싶은 건, 속도만큼의 불행이 아닐까.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햇살은 따가웠고, 볕에 노출된 팔다리와 뒷목이 따끔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식혀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주기적으로. 산과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숲을 지나면서 적당한 세기와 온도로 조절되는 것 같았다. 상쾌해 기분 좋아지게 하는 바람이었다. 두 팔 벌리고 몸을 더 크게 만들어서 바람을 받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이런 낯간지러운 행동이 가능하다. 매력적인 바람을 온몸으로 느꼈다. 걷는 이에게 불친절한 길이라고 툴툴대던 생각은, 바람이 싹 걷어가 버렸다. 혼자 맞는 바람은 혼자 받은 선물처럼 특별했다. 


한나절 가까이 걸려 비자림을 다녀왔다. 차를 탔으면 왕복 1시간이면 충분했을 거리다. 만약 차로 갔다면 무엇을 보았을까. 어떤 생각들이 내게로 왔을까. ‘속도는 시야(시선)와 생각의 크기와 반비례한다’는 그래프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한 달 살이에 뭐가 남았느냐"라고 누가 물어오면 "속도를 늦춰 보는 연습을 해봤다"고 아주 느린 웃음으로 답했으면 좋겠다. /y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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