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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Oct 13. 2021

평대를 감각하는 내 안의 온도

<슬기로운 평대생활> 27일째

삶에 리듬이 깃든다면 멋진 일이다. 육지에서의 삶에도 리듬이 없었다고 할 수 없겠지만 좀처럼 의식할 일이 없었다. 규칙적인 출퇴근과 야근, 달력에 적힌 일정을 소화하는 일상의 반복이 리듬일 수는 없다. 리듬을 좀처럼 타지 못하는 삶에서 “리듬이 깨졌다”는 말은 또 그렇게 쉽게 하며 살았다.   


제주살이는 단출한 의식주가 바탕이었기에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긴장할 일이 별로 없는 하루는 휴식과 걷기로 구성될 만큼 단조로웠다. 리듬은 이런 헐거운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그 시간에 올라타서 흔들거리며 흘러가는 동안에 ‘리듬’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체감하게 됐다. 감각된 리듬은 문신처럼 새겨지는 듯했다. 하루 위에 하루가 쌓이면서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 리듬을 ‘흥’이라 할 수 있을까. 가볍게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실은 듯 두둥실 들뜨는 마음이다. 누가 알려줄 수도 없는 감각,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될 수 있는 고유한 감각이다.  

산책을 나섰다가 바닷가 정자에 앉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옆에 슬쩍 앉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말씀들을 하시나 귀를 쫑긋 세웠다. 사투리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단어 한두 개를 짜깁기 해 추측할 뿐이다. 타 지역 사투리처럼 흉내 내 옮겨 적을 수도 없다. “지난 한 달 날씨가 참 좋았다”는 내용이었다. 옆에 앉은 육지사람 들으라고 일부러 그런 얘길 꺼냈는지도 모르겠다. 예년에 비해 비도 적었고, 날씨는 변덕스럽지도 않았으며, 자주 맑고 쾌청했다는 의미였다. 내 해석이 비슷하다면 대충 그런 얘기였을 거다.  


앞으로 기억하게 될 6월의 제주는 야무지게 날씨가 좋던 날의 하늘빛과 그걸 투영한 바다일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조변석개하는 날씨에 내내 비가 내렸더라면 나의 설레던 하루하루의 기록들은 달라졌을까. 그랬다면 비의 우울보다는 낭만을,  내려준 하늘과 빗속의 바다를 카메라에 담고 좋아라 하지 않았을까.

오늘 동네에서 놀기로 했다. 슬리퍼를 끌며 최대한 느리게 걸었다. 마치 서두를 이유 없는 마을 사람의 걸음인 것처럼. 자주 지나던 해안도로의 카페를 바라본다. 옛집을 뜯어 새로 반듯하게 지어 올린 카페는 좀 불편했다. 적어도 평대에서는 그랬다. 오가는 여행객들이 많이들 찾았다. 하지만 난 되도록 이곳을 피하려 했다. 난 여행객 아닌 주민처럼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이 갈 것 같지는 않은 카페였다. 하지만 오늘 난 내게 관대해지기로 했다. 옥상에 펼쳐놓은 침대 같은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에이드 한 잔 옆에 놓고 책을 펼쳤다.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어떤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장면의 어색함을 느끼면서.

걸어 다니며 항상 눈높이로 바라보던 풍광이 3층 높이에서 펼쳐지는 건 낯설었다. 해안을 따라 반원을 그리며 휘어지는 길과 길 따라 늘어선 단층의 가옥들, 마을 안으로 수줍은 듯 뻗어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곡선의 길, 옥상 주변으로 내려다보이는 옛집 지붕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시야가 활짝 열리면 다른 감각은 오히려 닫히는 듯했다. 곧 불편해지고 말았다. 저 자연과 꼭 닮은 곡선들과 지금 내가 딛고 있는 건물의 네모반듯한 직선들의 이질성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뭐라고 이런 주제넘은 생각을 하나 싶으면서도, 머릿속에 영상이 하나 돌아갔다. 곡선의 해안과 골목을 따라 네모나고 각진 새 건물들이 ‘타임랩스’로 촬영한 영상처럼 차례로 지어지며 마을을 가득 채우고 마는 것이었다. 평대도 직선으로 세워진 카페와 식당가가 돼 버릴 것인가. 인근의 마을처럼 결국 그리 되고 말 것인가. 제주의 위로는 바다만이 아닌데…. 입맛이 떨떠름해졌다. 어쩌겠나.  

오후 하늘이 깨끗했고 햇살은 따스했고 바다는 투명했다. 색과 빛이 서로 밀고 끌어주며 만들어낸 매력적이고 순한 기운에 휩쓸려 바다로 첨벙첨벙 들어갔다. 몸을 담갔다. 햇살에 데워진 적당한 온도의 물이 온몸을 감쌌다. 깊고 넉넉한 품에 안긴 듯 포근하고 편안했다. 이 느낌을 오래 간직할 거라 다짐하며 물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평대를 감각하는 내 안의 온도이자, 내 몸이 기억할 평대의 위로일 것이다. /y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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